얼음(SS)
쓰다보니 딱히 재미도 없고 뭔가 심심하고 쓸데없이 염장이 되었지만 걍 버림′ㅅ`
이 세계의 여름은 현실 세계의 그것만큼 뜨겁고 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름이 한창인 8월 한낮의 태양은 거리를 녹일 것처럼 뜨거운 빛을 퍼붓고 있었다.
<모험자>가 아무리 튼튼하고 현실 세계만큼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이란 경험과 시각에 크게 좌우되는 생물이다. 체감하는 더위가 현실보다 훨씬 덜하다고는 해도 이런 날씨에는 어쩐지 시원하고 그늘진 곳에서 꼼짝도 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거리 속에서 <흑검기사단>의 길드 캐슬만은 묘하게도 들뜬 분위기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길드회관에 들러서 몇 가지 안건을 처리하고서 아이잭에게 전달할 서류 몇 종류를 들고 <흑검기사단>에 찾아온 시로에는 그런 술렁거림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길드캐슬에 들어섰다. 별다른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드나들 때마다 허가가 필요한 건 귀찮다는 이유로 길드 마스터 본인이 이미 시로에의 출입을 무제한으로 허가해 둔 것이다.
바깥은 뜨거운 날씨에 흐느적대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기운이 넘친다. 신이 난 듯, 무언가를 기대하듯, 팔팔하게 뛰어다니는 모습들은 즐거운 것이기는 했지만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기분이 묘했다. 시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낯익은 통로를 따라 길드 마스터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커다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딸기! 시럽은 역시 딸기지!"
"메론 무시하냐 지금?!"
"난 키위가 좋은데."
"새로운 시도도 괜찮지 않나? 초코는 어때, 초코."
"너나 처먹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이 제멋대로 소리높여 주장한다. 귀가 아플 정도로 쏟아지는 소리들에 시로에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가를 찌푸렸지만, <흑검기사단>에게는 이것이 평범한 텐션이다. 대체 뭘 가지고 이렇게 열렬하게들 논쟁을 벌이는 건지. 시로에는 살짝 고개를 빼고 그들이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탁자 위를 살폈다.
그것은 큼지막한 그릇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투명하고 커다란 얼음이었다.
"뭐든 됐잖아, 중요한 건 이거라고. 그래서 뭘로 갈 건데, 이걸?"
"칼로?"
"도끼로?"
"그냥 때려서 깨부수면 안되나?"
"……."
입에 담는 내용은 흉흉하기 짝이 없는데 하나같이 어딘가 얼빠진 목소리다. 시로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했더니, 빙수라도 만드시려는 건가요."
"오? 언제 왔냐."
"지금 막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것은 길드 마스터인 아이잭 뿐이다. 나머지는 본격적으로 얼음을 갈 방법을 고민하는 것인지, 얼음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과연 폐인 집단, 하나에 골몰하면 다른 건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건가.
"그런데 갑자기 웬 얼음입니까?"
"우리야 <서몬>도 많으니까. 적당히 만들어보라고 했지."
"에, <서몬>이 만든 얼음은 먹어도 되는 거였나요?"
"뭐?"
"에?"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던 시로에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에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시로에는 일단 떠오른 대로 중얼중얼 이유를 설명해 보았다.
"아니, 그…. <서몬>이 어떤 방법으로 얼음을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마력으로 생성한 얼음이라거나 하면 그건 먹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음, 물을 준비해 두고 얼리기만 한 거라면 상관없으려나? 종자의 능력으로 얼린 거라면 괜찮을지도요. 하지만 마력으로 생성한 결과물을 직접 섭취한 전례는 없으니,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이, 이 얼음 어떻게 만든 거냐?"
"어, 글쎄요, 넌 아냐?"
"만든 놈이 알겠지."
속닥속닥, 아니 속닥속닥이라기엔 좀 큰 소리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남자들은 우르르 방을 뛰쳐나갔다. 아마도 이 얼음을 만든 <서몬>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시로에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력의 작용으로 생성된 결과물을 섭취해도 되는지 어떤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검증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연구해 두는 편이 좋겠지. 로데릭에게 의뢰하면 성분이나 마력의 작용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시로에가 새로 떠오른 안건을 이리저리 생각하는 사이 아이잭은 테이블 위의 얼음을 빤히 바라보았다. 못 먹는 건가, 이거. 오랜만에 시원한 빙수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들떴던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단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런 날씨에 빙수라는 것은 독특한 풍미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원하고.
아쉬운 듯이 얼음 조각 하나를 집어들어본 아이잭은 그 서늘한 냉기에 슬쩍 눈썹을 움직였다. <모험자>의 몸은 전투에서 받는 통각에는 상당히 둔화되어 있지만, 이런 일상적인 감각은 현실과 별다를 바가 없다. 집어올린 얼음의 차갑고 미끄러운 감각이 아이잭에게 약간의 장난기를 불러일으켰다.
"어이, 시로에. 잠깐 이리 와봐."
"예?"
아이잭의 부름에 시로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워낙이 체격이 큰 아이잭은 소파에 걸터앉은 채로도 서 있는 시로에와 그리 시선이 멀지 않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선 시로에의 팔을 가볍게 붙잡고 끌어당긴 아이잭은, 아이잭 쪽으로 약간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눈앞에 훤히 드러난 시로에의 하얀 목덜미에 녹아서 미끄러워진 얼음 조각을 슬쩍 떨어뜨렸다.
"──!?!"
작은 조각은 목덜미와 등에 물줄기를 남기며 옷 속으로 미끄러졌다. 그 차가운 감촉에 시로에는 소리도 못 내고 움츠러들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를 걷느라 더워서 약간 체온이 오른 몸에 얼음 조각의 냉기는 생각 이상으로 선명하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시로에는 옛날부터 더위보다도 추위에 훨씬 약한 편이었다.
다행히도 작은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서 그 냉기는 체온과 기온 양쪽에 흩어져 사라졌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적게나마 느끼고 있던 더위가 싹 날아가 버렸다. 으으, 하고 양팔을 감싸안고서 시로에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이잭을 노려보았다.
"으으, 무슨 짓입니까, 아이잭 씨."
"너도 더웠잖아? 어차피 못 먹는 거라면 시원하게 써야지."
"저는 원래 더위를 별로 안 타니까 필요없거든요. 아이잭 씨나 시원해지시죠!"
태연하게 씨익 웃으면서 대꾸하는 아이잭에게 발끈한 시로에는 그릇에서 손가락 세 개 정도는 될 법한 크기의 얼음조각을 집어들고 아이잭을 붙잡았다. 똑같이 뒷덜미에 쑤셔넣어서 받은 만큼 갚아줄 생각이었지만, 뻔히 눈앞에서 그 움직임을 보고도 당해줄 아이잭이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과격한 행동으로 나서는 시로에에게 당황은 하면서도 아이잭은 서둘러 시로에의 양팔을 붙잡고 막았다.
"어이, 야?!"
"저만 당하는 건 억울하잖아요?!"
"아니, 그건 좀 크지 않냐!?"
"덩치가 크니까 이 정도 차이는 있어야 공평하죠!"
"전혀 아니거든!?"
바둥바둥, 시로에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힘으로 아이잭을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아이잭도 시로에를 완전히 제압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양 팔을 잡은 채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거, 장난이 좀 심했나. 이렇게나 차가운 걸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그런 장난은 치지 말 걸. 그렇게 뒤늦게 반성해봤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시로에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아이잭은 알 수가 없었다. 눈 딱 감고 그냥 한번 당해줘 버릴까, 하기엔 시로에가 손에 들고 있는 얼음의 크기가 무섭다. 두꺼운 갑옷 속에 저런 얼음이 들어왔을 때 그 한기를 아무렇지 않게 견뎌낼 자신은 아이잭에게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자연스레 몸에 걸친 갑옷이 오늘따라 원망스럽다. 그렇게 양쪽 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버티기를 몇 분일까.
"어… 우리, 나가는 게 좋은가?"
"야, 넌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냐!"
아까 우르르 뛰쳐나갔던 <흑검기사단>의 멤버들이 어느샌가 돌아와서 문가에 반쯤 몸을 숨긴 채로 우물우물 묻는다. 곧바로 옆에 있던 다른 멤버의 타박이 이어지고, 그들은 미묘한 분위기로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우렁찬 외침을 남기고는 도망치듯 문까지 쾅 닫고 빠져나갔다.
"어…?"
"에…."
두 사람은 잠깐 문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투닥거리던 게 바보같아졌다. 시로에는 한숨을 푹 내쉬고 팔을 내렸고, 아이잭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에서 힘을 뺐다. 손이 시려워져서 쥐고 있던 얼음을 다시 그릇에 내려놓고 아이잭의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은 시로에는 얼음 그릇을 보면서 말했다.
"생각해보니 말인데요, 다소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 얼음을 먹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어차피 우리는 <모험자>잖아요? 단순한 얼음이 상태이상을 불러올 리는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
뭐야, 그럼 역시 먹어도 되는 거잖아. 아이잭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럼 역시 이 얼음들을 깨부수든 어쩌든 잘 갈아서──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문득 아이잭의 목덜미에 시로에의 손이 찰싹 닿았다.
"앗 차거!"
"얼음만큼 차갑지는 않을 텐데요?"
조금 심술궂게 웃는 시로에는 뿌듯해 보였다. 이 녀석, 그 얼음 조각 그렇게 갚아주고 싶었던 건가.
한참이나 얼음을 들고 있었던 탓이리라. 목덜미에 닿은 손은 평소 조금 체온이 낮은 편인 시로에의 체질을 감안하고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칫, 아이잭은 혀를 차고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멍청하게 그 얼음을 그대로 들고 있었냐."
"아이잭 씨가 얌전히 당해 줬으면 그런 일도 없었잖아요."
"넌 머리도 좋은 게 가끔 그렇게 바보같냐…. 뭐, 이러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지겠지."
"…안 그래도 여름이니까,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서 싫다고?"
"……."
아이잭의 반문에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시로에는 툭, 아이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삐죽삐죽한 갑옷에 용케도 기댄다고 내심 생각하고서 아이잭은 소리없이 스테이터스 화면을 조작해 장비를 교체했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점이 편리하다.
딱딱한 갑옷 대신 부드러운 천 옷 너머로 아이잭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게 된 시로에가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아이잭을 올려다본다.
아직 차가운 손을 감싸쥐고, 아이잭은 그 눈꺼풀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