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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기억
온
2014. 12. 5. 16:40
아침에 일어나서 본 창 밖의 세상은 흰색 일색이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거리며 건물이며 나무들이며, 모든 것을 뒤덮은 두툼한 흰 융단에 새삼스레 감탄이 나온다. 이렇게 많은 눈이 다 어디서 온 걸까. 현실의 도쿄는 그다지 눈이 오지 않는 지역이지만 이 세계의 기후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23년 기억을 통틀어 이렇게나 잔뜩 쌓인 눈을 보는 것은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시로에는 길드 하우스를 나섰다.
<대지인>들은 적어도 일상 생활에 있어서는 <모험자>보다 훨씬 부지런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길 가운데에 쌓인 눈들은 양쪽으로 치워져서, 사람과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는 절실한 일이었던 거겠지.
지나가는 길에는 종종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은 눈사람들이 서있기도 했다. 만듦새로 봐서는 <모험자>들의 소행이리라. 축제를 좋아하는 아키바 거리의 주민들은 첫눈을 전심전력으로 환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지인>들이 낯선 그 조형물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기왕 이렇게 눈이 내린 거, 눈 조각 대회 같은 거라도 열면 어떨까. <모험자>와 <대지인>이 팀으로 출전해야 한다는 조항을 걸면 서로의 교류를 위한 좋은 기회도 될 것 같고, 재미있는 이벤트가 되지 않을까? 무심코 떠오른 그런 생각을 마음 속의 메모장에 적어넣으며 시로에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눈사람이라.
시로에는 어려서부터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눈에는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마력이 있다.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는 편인 시로에도 그때만은 마당에 나가서 쌓인 눈을 긁어모아 작은 눈사람이며 눈토끼를 잔뜩 만들곤 했다. 손이 새빨갛게 어는 것도 모른 채 눈이란 눈은 모두 긁어모아 올망졸망한 눈사람들을 만들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동네 이곳저곳에 나타나는 제 키보다 더 큰 눈사람에는 동경을 품고 있었지만, 어린 시로에 혼자서 그렇게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기에는 힘에 부쳤다. 대신에 시로에는 작은 손으로 눈사람이며 눈토끼, 여러 가지 모양의 눈집 등등, 눈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잔뜩 만들어 마당 한켠에 늘어놓곤 했다.
제 손으로 만든 작은 눈의 왕국이 얼어붙은 하얀 입김에 흐려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시로에에게는 겨울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이런 데서 뭐하냐, 너?"
"……아."
낯익은 목소리에 시로에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쥐었던 한움큼의 눈이 퍼석 하고 부스러졌다.
"어……, 그러게요. 뭘 한 거지……."
아직 조금 멍한 기분인 채로 시로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빨갛다. 얼마 동안이나 눈덩이를 만지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들어 말을 건 상대를 올려다보니 그는 묘하게 눈썹을 찌푸린 표정으로 시로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하얗게 덮인 세상 속에서 성큼성큼 다가와서 아직도 부서진 눈덩이 조각을 든 채였던 시로에의 손을 끌어당겼다. 조각들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시로에는 어쩐지 곤란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장갑도 안 끼고 뭘 한 거야. 눈사람은 왜 또 그렇게 잔뜩 만든 건데?"
"에?"
그 말에 퍼뜩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다종다양한 크기의 눈사람들이 시로에의 주변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무릎 높이의 조금 큰 녀석부터 손바닥 위에 올라갈 법한 작은 것까지. 눈으로만 만들어진 것이라 얼굴이 그려져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잔뜩 늘어놓고 멍하니 눈을 만지고 있었다면 그건 조금 호러다. 시로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지금의 자신은 어린 시절 같은 외톨이가 아닐 터인데.
담장 너머에서 동네 아이들이 신이 나 떠드는 소리를 어쩐지 멀리 들으면서 혼자뿐인 마당에서 멍하니 눈을 뭉치곤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말이지, 어린 시절의 환경이란 무서운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시로에의 마음 속 어딘가는 그 혼자뿐인 새하얀 마당에 매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얀 눈이 소리의 여운을 먹어치우는, 기이하게 고요한 그 시간 속에.
"기왕 만들 거라면 큼지막한 게 낫지 않냐. 네녀석 키보다 더 큰 거."
"아이잭 씨 답다면 다운 소리긴 한데, 그렇게 큰 걸 어떻게 만들라는 건가요."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못할 게 뭐 있어?"
그렇게 말하고 아이잭은 그 자리에서 눈 한 덩이를 끌어모아 굴리기 시작했다. 눈 깜박할 새 주먹 크기에서 축구공만한 크기가 된 눈덩이를 시로에에게 던지듯 떠넘긴다.
"그게 머리. 할 수 있는 데까지 크게 만들어보자고."
"에?"
눈덩이를 받아든 시로에가 당황해 아이잭을 다시 보았지만, 그는 벌써 두 번째 눈덩이 만들기에 돌입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뭉친 눈을 쌓인 눈 위에 몇 차례 굴리고 툭툭 두드리자 금세 다시 축구공만한 눈덩이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이거.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고?
멍하니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한 아이잭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로에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나잇살이나 먹은 어른들이 눈사람 만들기라니 뭔가요, 대체."
"네가 그런 말 할 군번이냐? 저기 잔뜩 있는 것들은 뭔데."
"저건 그냥 눈뭉치죠. 눈사람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지금?"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도 쌓인 눈 위에 굴리기 시작한 눈덩어리는 금방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한 자리에서 조물조물 뭉치는 정도로 만족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아키바에 2m 크기의 거대 눈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앞으로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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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온 김에'ㅅ'-3
모험자 힘이라면 눈덩어리가 아무리 커도 뚝딱 머리 위에 올릴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