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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인도(SS)
온
2015. 11. 24. 21:58
"시로에 군은 꽃으로 말한다면, 아이리스일까요."
크러스티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어느 평범한 오후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시로에의 손에는 <원탁회의>에 관한 서류가 한아름 들려 있었고 크러스티도 책상 한쪽에 해야 할 일과 처리가 끝난 일거리를 잔뜩 쌓아둔 채다. 여태껏 실컷 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맥락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시로에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웬 꽃 얘깁니까? 아이리스라니."
"아, 혹시 모릅니까? 붓꽃이라고도 하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짐짓 모르는 척 핀트가 다른 대답을 해 보였더니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면서도 표정에서는 이 사람 또 이러네, 하고 반쯤 포기한 기색이 보이는 것이 재미있다. 그의 안에서 자신은 필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골치아픈 사람이겠지. 크러스티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그냥 떠오른 연상일 뿐입니다만. ──아, 그렇지."
"……또 뭔가요?"
"시로에 군이 저와 닮은 꽃을 말해 준다면 이유를 알려주기로 하죠."
"하아?"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고 시로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런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까부터 진짜 이 사람 뭐라는 거지. 도무지 생각의 전개를 따라갈 수가 없다. 아이리스고 뭐고 그냥 모르는 척 흘려버릴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반사적으로 크러스티라면 어떤 꽃이 어울릴지 머릿속의 사전이 좌르륵 펼쳐진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리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런 병렬 사고 필요없어.
"……역시, 장미……려나?"
그러나 꽃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 시로에가 아무리 머릿속의 사전을 뒤진다 해도 애초에 사전이 얄팍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크러스티에게 어울릴 만한' 이라는 단서까지 붙고 보면 역시 떠오르는 것은 그 정도였다. 화려하고,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존재감 강하고. ……제가 떠올렸지만 역시 너무 안이한 선택인 게,
"너무 안이한 선택 아닙니까?"
"안이해서 죄송하게 됐네요!"
물론 뻔히 표정에 드러나는 그런 생각을 크러스티가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치고 만 시로에는 하아, 하고 참았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얘기가 이렇게 된 거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라. 이유는 필요없습니까?"
"연상이라면서요. 어차피 들어도 별 영양가있는 얘기는 아닐 것 같고. 아까 말했던 안건들이나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못을 박고 시로에는 재빠르게 문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마치 토끼가 도망치는 것 같은 그 태도에 크러스티는 이런이런,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왜 장미인지 물론 짐작은 가지만, 역시 직접 말하는 게 듣고 싶었는데.
이 세계에 붓꽃이 있는지는 사실 크러스티도 잘 모른다. 이곳의 식생은 현실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고, 같은 식물이라도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으니. 그러니까 기억─아마도 손상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에 의존해서 그 모습을 그려보면, 역시 문득 닮았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곧게 뻗은 줄기와, 예로부터 귀한 색으로 여겨졌던 보랏빛 꽃잎. 그 꽃의 긴 잎사귀는 검을 닮았다고 하며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유래부터가 검에서 기인했다는 설까지 있다. 그리고, 무지개의 여신이 전하는 신들의 전언傳言.
역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더라도 말하기는 어려웠으려나.
창문에서 스며든 가느다란 햇살이 무지개빛으로 부서지는 것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크러스티는 혼자서 작게 웃었다.
트위터에 투척했던 단문 백업(2015.06.03)
크러스티가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어느 평범한 오후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시로에의 손에는 <원탁회의>에 관한 서류가 한아름 들려 있었고 크러스티도 책상 한쪽에 해야 할 일과 처리가 끝난 일거리를 잔뜩 쌓아둔 채다. 여태껏 실컷 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맥락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시로에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웬 꽃 얘깁니까? 아이리스라니."
"아, 혹시 모릅니까? 붓꽃이라고도 하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짐짓 모르는 척 핀트가 다른 대답을 해 보였더니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면서도 표정에서는 이 사람 또 이러네, 하고 반쯤 포기한 기색이 보이는 것이 재미있다. 그의 안에서 자신은 필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골치아픈 사람이겠지. 크러스티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그냥 떠오른 연상일 뿐입니다만. ──아, 그렇지."
"……또 뭔가요?"
"시로에 군이 저와 닮은 꽃을 말해 준다면 이유를 알려주기로 하죠."
"하아?"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고 시로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런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까부터 진짜 이 사람 뭐라는 거지. 도무지 생각의 전개를 따라갈 수가 없다. 아이리스고 뭐고 그냥 모르는 척 흘려버릴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반사적으로 크러스티라면 어떤 꽃이 어울릴지 머릿속의 사전이 좌르륵 펼쳐진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리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런 병렬 사고 필요없어.
"……역시, 장미……려나?"
그러나 꽃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 시로에가 아무리 머릿속의 사전을 뒤진다 해도 애초에 사전이 얄팍하기 짝이 없다. 거기에 '크러스티에게 어울릴 만한' 이라는 단서까지 붙고 보면 역시 떠오르는 것은 그 정도였다. 화려하고,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존재감 강하고. ……제가 떠올렸지만 역시 너무 안이한 선택인 게,
"너무 안이한 선택 아닙니까?"
"안이해서 죄송하게 됐네요!"
물론 뻔히 표정에 드러나는 그런 생각을 크러스티가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치고 만 시로에는 하아, 하고 참았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얘기가 이렇게 된 거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라. 이유는 필요없습니까?"
"연상이라면서요. 어차피 들어도 별 영양가있는 얘기는 아닐 것 같고. 아까 말했던 안건들이나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못을 박고 시로에는 재빠르게 문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마치 토끼가 도망치는 것 같은 그 태도에 크러스티는 이런이런,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왜 장미인지 물론 짐작은 가지만, 역시 직접 말하는 게 듣고 싶었는데.
이 세계에 붓꽃이 있는지는 사실 크러스티도 잘 모른다. 이곳의 식생은 현실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고, 같은 식물이라도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으니. 그러니까 기억─아마도 손상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에 의존해서 그 모습을 그려보면, 역시 문득 닮았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곧게 뻗은 줄기와, 예로부터 귀한 색으로 여겨졌던 보랏빛 꽃잎. 그 꽃의 긴 잎사귀는 검을 닮았다고 하며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유래부터가 검에서 기인했다는 설까지 있다. 그리고, 무지개의 여신이 전하는 신들의 전언傳言.
역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더라도 말하기는 어려웠으려나.
창문에서 스며든 가느다란 햇살이 무지개빛으로 부서지는 것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크러스티는 혼자서 작게 웃었다.
트위터에 투척했던 단문 백업(201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