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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천 (샘플)
온
2016. 5. 10. 19:24
표지는 이든님(@edennim)의 표지 커미션입니다!
제7회 디페에 나오는 로그 호라이즌 크러스티x시로에 소설본 <호중천>의 샘플입니다.
크러스티 씨랑 시로에가 꿈 속 데이트(?)하는 책. 크러스티 씨가 꿈에서 못 깨게 되거나 시로에가 그걸 해결하려고 뛰어다니거나(?) 합니다. 연애는… 음… 1% 정도 합니다…()
샘플은 2챕터의 서두입니다.
(전략)
꿈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초원과 호수, 갈대밭과 하늘이었다. 바닥에 깔린 키 작은 풀들은 갓 자란 연녹색으로 부드러웠고, 푸른 갈대잎이 바람에 스쳐 물결 같은 소리를 낸다. 하늘은 맑고, 호수는 그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 아름다운 비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물가 특유의 물기어린 풋내가 가득히 차올랐다.
"민물 냄새……."
분명히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이상한 일이다. 꿈이라고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자신의 의식도 그렇지만, 어째서 꿈이 이렇게 선명하고 섬세한 색채와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째서 냄새까지 이렇게 생생한 걸까. 꿈이란 무의식의 세계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에게 가까운 것들로 세계가 구성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자신에게 친근한 것은 호수의 민물 냄새보다는 부두의 바닷물 냄새일 텐데.
다양한 의문을 품으면서도 시로에는 일단 천천히 걸어 호숫가로 향했다. 길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풀잎을 밟는 부드러운 감촉이 선명했다.
물은 찰랑거리면서 마치 작은 파도처럼 때때로 풀숲을 덮치고 있었다. 젖은 풀잎이 은빛 모래에 뿌리를 박고 그 잔잔한 물결에 쓸려갔다 돌아오기를 되풀이한다. 그때마다 함께 휩쓸리는 모래 알갱이가 사금처럼 반짝였다.
낮에 크러스티와 나누었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아 이런 정경이 그려진 걸까.
며칠째 그의 잠을 방해하고 있다는 꿈의 내용을 묻자 크러스티는 이런 말로 답했다.
──아발론, 이니스프리. 언젠가 돌아가리라 여길 꿈의 이상향.
누군가가 이 꿈에 대해 묻는다면 저라도 필시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물고기 한 마리,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외로운 풍경이지만 분명 이곳은 이상향의 원개념과도 같은 장소였다.
"여기서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인데."
문득 목소리와 함께 곁에 다가와 선 인기척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꿈 속에 저 외의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크러스티 씨……?"
"낮에 꿈 이야기를 나눈 탓일까요. 좋은 밤입니다, 시로에 군."
푸른 하늘 아래 실로 어울리지 않는 인사에 시로에는 기묘한 표정을 했다. 이 꿈 바깥의 세계는 지금 밤인 것이 당연하니 틀린 말이 아니라고는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것을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꿈 속이라도 크러스티는 크러스티라는 생각에 절로 쓴웃음이 떠오른다.
"예, 좋은 밤…이네요. 이게 크러스티 씨가 말했던 '그 꿈'입니까?"
"글쎄요. 배경은 같은 것 같습니다만 이 꿈에 사람이……. 아니, 나 외의 살아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 어떤 메커니즘인지 짐작이 안 가는군요."
슬쩍 턱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너무나 시로에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크러스티라서 이 꿈의 재현도에 살짝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시로에는 꿈 속의 크러스티를 보는 대신 호수 저편의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는 나무가 우거진 작은 섬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발론, 이니스프리……. 그렇게 표현했었죠."
"예에. 이해가 됩니까?"
"확실히 그대로군요. 이윽고 돌아갈 <이상향>. 이상한 말이지만 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에덴과 아발론의 차이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한쪽은 주어졌되 잃어버린 낙원. 다른 한쪽은 언젠가 돌아갈 고향. 사람은 낙원에 들기를 바라고 이상향에 향수를 품는다. 가진 적 없어 돌아갈 길도 없는 것에 대한 덧없는 향수.
"시로에 군은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하군요."
크러스티는 슬쩍 웃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감성적인 말을 하고 말았다. 시로에는 약간 민망해져서 딴청을 피우듯 호수 저편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크러스티의 웃음은 놀리려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엷게 웃음기 어린 얼굴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람의 상상력은 개체간 차이는 크지만 군체가 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차이는 없다지요. 아발론도 도원향도, 문화가 달라 세부적인 형상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승의 원형은 비슷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 그것을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형태로, 인간 세상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낙원을 대상으로 삼았을 때 그려지는 공통적인 이상향의 그림이 그런 거겠죠."
"사실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심상心象의 낙원……이라는 건가요."
특별히 강렬하게 낙원을 바란 적은 없다 해도 누구나가 왠지 모르게 가지고 있는 이상향에 대한 환상. 어쩌면 낮에 크러스티가 드물게도 몽환적인 단어로 표현했던 이상향의 모습이 시로에 역시 품고 있었던 무의식 속의 이상향을 자극하는 바람에 꿈 속에 그것이 펼쳐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에 크러스티가 있는 것도 그 대화 탓일까?
시로에는 옆에 선 크러스티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이게 꿈이 확실하다면 이 크러스티도 그저 제 꿈의 등장인물일 텐데, 모습은 물론이고 그 언동까지 기이할 정도로 진짜 같다. 자신의 기억과 무의식에 근거한 꿈 속의 인물이 이렇게까지 완벽한 완성도를 가질 수 있을까?
시로에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쯤 크러스티가 피식 웃으며 비슷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묘한 일이군요. 분명히 이건 꿈 속일 텐데 시로에 군이 굉장히 진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우연이네요. 크러스티 씨, 굉장히 크러스티 씨 같아서…."
자각몽이라는 건 이렇게도 의사 반영이 확실한 꿈인가. 자신이 방금 생각한 것을 그대로 먼저 말로 하는 크러스티를 저도 모르게 복잡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시로에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 꿈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이상하다. 꿈 속의 상대와 꿈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 어떻게 이런 기묘한 일이 다 있을까.
꿈의 이상함에 고개를 젓는 시로에를 내려다본 크러스티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진짜인지 어떤지 확인해볼까요."
"에?"
다른 데 신경을 쏟고 있었던 탓에 반응이 조금 늦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려는 순간에는 이미 크러스티의 손이 어깨에 닿아 있었다. 약간 서늘하지만 확실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 손의 감촉에 시로에는 다시 한 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잠깐만, 확인? 뭘? 어떻게? 뒤이어 그런 의문을 연달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어깨에 닿았던 손이 슬쩍 힘주어 시로에를 누르고, 당황해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얼굴에 상대의 얼굴이 다가온다. 시로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단단한 손에 붙들린 채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의 사태 변화에 한순간 호흡과 함께 생각조차 멈춰 버린 시로에의 입술에, 크러스티의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