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Santa Claus
<46번째 밀실>에서 1년 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범인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건의 뒷처리에 관한 동인설정이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탓인지, 문득 깨닫고 보면 달이 바뀌어 있는 일은 드물지 않다. 물론 시즌에 관계된 일이 들어오거나 하면 벌써 그럴 땐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대개 잡지의 발매 스케줄 등의 이유로 몇 주, 길게는 한 달 이상도 앞서는 탓에 어렴풋한 계절감에서 그칠 뿐 실감까지는 나지 않는다. 뒤늦게서야 그러고 보니 그런 원고를 한 적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하고, 무심코 외출했다가 거리 여기저기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등의 오브제를 보고서야 어느샌가 12월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신에 대한 변명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떠올리려니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연말조차 잊고 있었다니. 대체 얼마나 방에 처박혀 있었던 거야.
사실 마감도 있고 하니 날짜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12월 12월 하면서도 어째선지 연말이라는 것만을 홀랑 까먹고 있었다고 할까, 한참 먼 일처럼 느꼈다고 할까.
…누구에게 말해도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겠지. 나는 얌전히 자신의 둔감한 시간관념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일단 귓가에 울리는 성질 급한 크리스마스 캐롤을 의식하고 났더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캐롤에는 듣는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마력이라도 있는 걸까? 식재료를 사러 나온 길이지만 이참에 자그마한 트리라도 하나쯤 집에 장식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귀에 익은 멜로디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나는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모여 있는 기획 코너를 둘러보았다. 몇 년 전부터 크리스마스를 성화장에서 맞이하게 되고 나서는 특별히 집에서까지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필요는 없었지만──.
"……아."
을씨년스럽게 텅 빈 저택의 모습이 문득 눈앞을 스쳤다.
그 저택에서 매년 열리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작년에 피에 젖은 폐막을 맞이했다. 다시는 성화장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새삼스럽게도 뒤통수를 한 대 엊어맞은 기분이 되어 나는 호랑가시나무를 본뜬 가짜 이파리와 붉은 열매 모형이 얽힌 리스를 손에 든 채 만지작거렸다.
마카베 세이치의 이름은 그날 함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탄 냄새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만을 상기시키는 꺼림칙한 화제가 되어 있었다. 이시마치는 순순히 모든 범행을 인정하고 재판을 받은 후 복역 중이다. 아야코는──글쎄. 그녀의 소식은 그다지 들을 기회가 없었다.
비극의 무대가 되었던 성화장은 이제 빈 집이다. 마카베 사치코도, 마호도, 코지도 이미 그 집에는 없다.
마카베 일가는──크리스마스에 1주기를 맞이하게 되는 걸까.
그건 어쩐지 가슴이 무겁고 답답해지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나는 12월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웬 바람이야?"
테이블 위에 둔 손바닥 사이즈의 도기 산타 인형을 보고 히무라가 물었다. 선물 꾸러미 가득한 썰매와 순록까지 딸린 풀 세트다. 만듦새는 조잡하지만 집안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감돌게 하기에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그냥 뭐, 그런 시기고?"
"흐음."
지금까지 이 집에 그런 장식품이 있었던 적은 없으니 히무라의 질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대답이 궁했다.
기획 코너 앞에서 어슬렁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기분으로 장식품들을 조물대기를 한참, 조금 전의 들뜬 기분은 어느샌가 밀어닥친 복잡한 감상들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포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어떤 기분으로 구입을 결정한 건지는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일단 사온 이상 구석에 장식하거나 어딘가에 처박아 두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위치는 정중하게 테이블 위.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지만 당연하게도 답을 내려줄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히무라는 인형을 집어들고 순록의 매끄러운 빨간 코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세 마리 중 한 마리만 코끝이 빨간 걸 보면 그 녀석이 루돌프겠지.
"하긴 매년 이맘때쯤 되면 토키에 할머니도 집안 장식에 신경을 쓰시던데. 퀼트 장식 루돌프라던가 리스 같은 거. 트리나 초는 고양이들이 타고 올라서 넘어뜨릴까봐 놓을 수 없지만."
"모모라면 아무리 큰 트리라도 꼭대기까지 올라갈 것 같네."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건 고양이의 본능이니까."
모모는 히무라가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이다. 상당한 말괄량이다.
"넌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할 생각이야?"
"별 거 없어. 올해는 송년회 일정도 더 늦게 잡혀 있고. 고양이들의 산타나 되어 볼까."
"아이들의 산타가 되기도 전에 고양이 산타가 되는 건가. 장난감이라도 선물하려고?"
"애들이건 고양이건, 어지간한 장난감은 일주일을 못 버틸 테지."
남의 일처럼 대꾸하고서 히무라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리스. 넌 산타를 몇 살까지 믿었어?"
"에? 글쎄…, 초등학교 때쯤엔 안 믿었지 싶은데. 하지만 요즘 생각하기엔 있다고 해두는 것도 꿈이 있어서 좋을 것 같지."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 꿈을 꾸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나쁜 버릇이라고 한다. 나쁜 인간의 관습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나를 향해 히무라는 감개 깊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을 먹어도 꿈꾸는 어린이라 이건가. 작가선생다운걸."
"난 동화 작가가 아니지만. 그러는 너는?"
이런 때만 선생 소릴 붙이는 히무라의 성격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내가 되묻자 히무라는 잠깐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글쎄, 난 처음부터 안 믿었던 것 같은데."
"우와, 꿈이 없는 녀석."
반사적으로 핀잔하듯 대꾸는 했지만, 예상한 대로의 대답이기도 했다. 지금도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이 친구가 그런 불확실한 존재에 소원을 비는 순수한 어린 시절이 있었으리라고는 그다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이 없었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지만.
짧은 모순에 빠진 나를 보고 피식 웃은 친구가 심술궂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지금까지도 꿈이 가득하신 아리스가와 선생. 산타한테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엑? 어, 그야… 애들 희망이라면 뻔하지 않아?"
장난감이라거나, 책이라거나. 어렴풋한 기억에도 왜 그렇게 갖고 싶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시시한 물건들이라는 자각은 있었기에 나는 슬쩍 즉답을 피했지만 히무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추궁했다.
"꼭 그렇지도 않던걸. 애들이란 종종 생각지도 못한 소원을 말해서 부모를 당황하게 하는 생물이잖아?"
"글쎄, 내 경우는 그렇게까지……아."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있어서 나는 뚝 말을 끊었다. 끊고서야 이건 오히려 호기심을 부추길 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히무라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외면하고 싶어도 임상범죄학자를 앞에 두고 내심을 얼버무릴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삭빠르지 못했다. 아니, 내가 범죄자라는 건 아니고.
"…웃으면 안 돼."
"그렇게까지 망설이니까 더 자신이 없어지지만."
"어릴 적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뭐였는데?"
우물쭈물하면서도 나는 백기를 들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산타에게 보내는 편지에 '운명의 상대를 보내주세요'라고 쓴 적이 있어."
나는 죄없는 벽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짧은 침묵이 어찌나 무거운지. 정적이 이렇게나 곤란했던 적은 전에도 앞으로도 다시 없겠지. 이제 와서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꼬마 로맨티스트다. 대체 어디서 무슨 순애 영화라도 보고 왔던 걸까? 이 편지를 받았을 부모님의 표정은 지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금 히무라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여기는 내 집. 자리는 정면. 무슨 벌칙 게임이냐 이건. 침묵을 참다못해 슬금슬금 히무라를 보자 역시나 채 웃음을 다 억누르지 못했는지 애써 입가를 누르고 있다. 푸욱,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래서, 산타는 소원을 들어줬어?"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꾸했다.
"그럴 리가. 아마 그 뒤로 산타를 믿지 않게 된 게 아닐까."
"그럼 진지한 소원이었단 얘기군."
"……."
타당하다면 타당한 추론에 다시금 얼굴이 뜨거워진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체 캔맥주를 가지러 간다는, 진짜 어린이라면 댈 수 없을 핑계를 대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캔맥주를 못 본 체 괜시리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마카베 일가에 대한 씁쓸한 상념은 어느샌가 변덕스러운 물결에 쓸려나가 깊은 곳을 떠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