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개를 길들이는 방법
커플링 요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없나? 없는듯. 하지만 쓰는 사람이 사람인지라 단언은 못 하겠고()
아이잭은 험상궂게 생겼지만 허당인 대형견이라고 생각함. 대표적으로 말라뮤트라던가.
"일단 여쭙겠습니다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한 손에 서류 다발을 든 채 차분한 어조로 묻는 시로에의 목소리는 에베레스트의 만년설만큼 차가웠다. 이쪽을 바라보는 표정과 눈빛도 북극의 빙하가 떠오를 정도로 냉랭하다. 눈앞에서 그 눈빛을 직면한 <흑검기사단>의 두 사람, 아이잭과 레저릭은 고레벨 모험자라면 느낄 리가 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어느샌가 순찰 전담이 된 것 같은 <흑검기사단>에, 확실히 적재적소일까 싶어 순찰 임무를 일임하다시피 한 것은 인정합니다.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순찰을 핑계로 레이드에 다녀오는 것도 2~3일 정도라면 그럭저럭 눈감아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드에 열중한 나머지 긴급을 요하는 서류가 누락된 채로 일주일이나 행방불명이 되어서야──곤란합니다. 굉장히 곤란한 일이죠. 이 서류가 실종되는 바람에 <대지인> 분들과의 거래에 여러 가지 절차상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카라신 씨가 정신없이 뛰어다녀서 어떻게든 해결은 되었지만,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서 사무작업 전반이 적게나마 지연되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서류를 전달하러 갔을 때 길드홀에 남아있던 연락책이 텔레파시를 걸었지만 받지 않으셨다고요. 그대로 잊어버린 연락책에게도 책임은 물론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는 게 드물지 않은 일이라는 말도 들리던데──설마 아니겠지요? 한 길드의 마스터이며 <원탁회의>의 한 자리를 맡은 몸으로서, 연락의 중요성은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설마 그 정도로 책임감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근시안적인 운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순식간에 쏟아지는 말의 홍수에 아이잭은 창백해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렸다. 말하는 것은 시로에인데 듣는 이쪽의 숨이 다 막혀 온다. 설마 누가 보스전이 한창일 때 연락이 올 줄 알았나. 아주 약간만 숨을 돌릴 셈이었지 결코 작정하고 서류를 내팽개치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본의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은 절절했지만, 누락된 서류를 찾아헤매느라 한바탕 뒤집어졌던 길드회관 사무실이나 정신없이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며 뛰어다니던 카라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필 그 시간에 서류가 올 줄 알 게 뭐야."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본의가 아닌, 말하자면 사고였기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조금 억울한 아이잭이었다. 그야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하는 생각에 아이잭은 사소한 반항을 시도한 것이다.
불에 기름을 끼얹는…아니, 화약을 던져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잭의 발언에 숨을 삼킨 것은 시로에가 아니라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레저릭이었다.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에 차마 대꾸도 못 하고 시로에의 설교를 얌전히 듣고 있던 그는 이 순간 시로에의 등뒤에서 거대하고 불길하고 시커먼 그림자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후일 증언했다.
시로에는 그 불길한 그림자를 휘감은 채로,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좋습니다, 아이잭 씨. 어차피 말로 해서 통할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안 했으니까요."
"어엉?"
눈을 부라리며 인상을 쓰는 아이잭의 얼굴은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는 험악했지만, 상대는 그 '능구렁이' 시로에다. 통할 리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아이잭 씨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습니다만… 반성할 마음이 없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당분간 제 일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뭐? 누구 맘대로."
"원탁회의의 허가는 이미 받았습니다. 덧붙여 미치타카 씨는 '눅눅한 전병 30일형', 크러스티 씨는 '길드회관 15일 연금형'을 추천하셨습니다만."
"……."
그쪽이 좋으시다면야 뭐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고 일부러인 듯 심술궂은 눈초리로 웃어보이는 시로에에게 아이잭은 어깨를 푹 떨구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시로에는 엄청나게 불쾌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이잭을 동반하고 <기록의 지평선>의 길드홀로 돌아왔다. <흑검기사단>은 당분간 길드 마스터가 부재인 상태가 되겠지만 이 선고를 들은 레저릭이 "부디 뜻대로!!"라고 넙죽 엎드렸으니 그쪽의 뒷일은 맡겨도 될 터다. 숙박하게 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혹시 하게 된다면 필요한 물건 등은 나중에 <흑검기사단> 멤버가 가져다 주기로 했다. 수학여행도 아니고, 라며 아이잭은 불만스러워 했지만 이것은 원탁회의가 인준한 처벌의 일종이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이런, 시로에치. 손님일까냥?"
"아, 반장님.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원탁회의> 결정으로 아이잭 씨가 당분간 제 일을 도와주시기로 해서요."
"이거 참…."
시로에가 돌아온 기척을 눈치채고 마중하러 나온 고양이 신사──냥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음직한 미소를 띄웠다. 뭔가 수상쩍은 미소에 아이잭이 내심 울컥했지만, 늘씬한 묘인족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녁식사를 1인분 추가해야겠다냥" 하는 말을 남기고 다시 주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아무래도 한창 식사 준비를 하던 도중이었던 모양이다.
"올라가죠, 아이잭 씨. 제 방은 2층입니다."
언제까지고 투덜대고 있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짓이다. 아이잭은 먼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 시로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창 이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한 번 찾아왔던 길드홀은, 그때의 황량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늑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올라서자 바로 보이는 거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박하고 귀여운 쿠션들이 함께 놓여 있는 것은 역시 여자아이들의 센스일까. 아무리 규모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먹고 잘 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살풍경한 <흑검기사단>의 길드홀과는 영 딴판이다.
시로에가 먼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아이잭도 어쩐지 불편한 기분으로 따라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얼어붙었다.
"…어이. 설마 그게 다…."
"물론 처리할 서류들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마무리된 안건도 있어서 줄어든 편인데요."
걸치고 있던 흰 망토를 벗어들면서 시로에는 대답했다. 시로에가 평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책상은 서류에 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벽과 책상 앞에도 몇 덩어리의 서류더미가 쌓여 있다. 어떻게든 분류는 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아이잭으로서는 뭐가 어떻게 나뉘어 있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아이잭 씨는 이쪽 보고서들을. 비슷한 종류로 모아 두었으니 한번씩 읽고 적당히 요약해서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 다음 회의에 보고할 자료니까요."
"어, 어어…."
종이더미의 위세에 압도당한 아이잭은 그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평균 수면시간 3시간, 주3회 철야는 옵션이라던 소문도 아주 틀린 건 아니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불만을 말할 의욕조차 잃어버린 채 아이잭은 시로에가 가리킨 소파테이블에 서류를 쌓아놓고 의자에 앉아 펜을 쥐었다.
그로부터 한동안은 종이 넘어가는 소리나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끔 아이잭이 으음, 이나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긁적이기는 했지만 그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아이잭의 성격에 맞춰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사냥터와 레이드 등에 관한 정보 정리를 넘긴 것이 유효했던 모양이라고, 시로에는 냉정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역시 직접 전투가 아니라 종이를 노려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그 집중력도 슬슬 끊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앓는 소리를 내는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다. 시로에는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바라보는 것은 30초 후의 미래──마침내 끙끙대며 어깨를 웅크리고 서류를 노려보던 아이잭이 종이 다발을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 순간.
"으아, 못해먹겠…!"
"지금쯤 식사 준비가 됐을 것 같네요. 나가볼까요."
적확한 타이밍을 노려 시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치려던 찰나에 말을 끊긴 아이잭은 엉? 어? 하고 김이 빠진 얼굴로 시로에와 서류를 번갈아 보고 있다. 어리둥절한 듯한 그 모습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형견을 떠올리게 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시로에는 꾹 참았다. 여기서 웃었다간 쓸데없이 아이잭의 성질을 돋울 뿐이다.
"오늘 저녁은 햄버그라고 하던데요. 아이잭 씨도 입맛에 맞으면 좋겠군요."
뭐야 그 어린애용 메뉴는, 하고 생각한 것은 문이 열릴 때까지였다. 문을 열자마자 강렬하게 풍겨오는 풍부하고 맛있는 음식 향기에, 익숙지 않은 두뇌 노동에 지친 몸이 강렬하게 공복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시로에 씨!"
냥타를 도와 접시를 나르던 미노리가 시로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시로에도 웃으며 부지런한 <칸나기> 소녀에게 응답했다.
"안녕, 미노리. 오늘은 어땠어?"
"좋았어요! 오늘은 새로운 사냥터에 가봤는데, 처음 보는 몬스터라서 좀 긴장하긴 했지만… 앗."
시로에의 등 뒤에 따라나서는 낯선 모습을 그제야 발견한 것인지 미노리는 움찔해서 입을 가렸다. 시로에가 슬쩍 아이잭 쪽을 곁눈질하며 미노리를 토닥였다.
"괜찮아. 인상은 좀 험상궂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어이, 능구렁이. 뭔가 자연스럽게 사람 앞에서 험담을 하지 않았냐."
"말투는 저래도 알고 보면 친절한 사람이야. 당분간 내 서류 작업을 좀 도와주시기로 했거든."
아이잭이 불평을 하거나 말거나 소개가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를 내용을 미노리에게 말하자, 미노리는 순간 환해진 얼굴로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럼 시로에 씨도 좀 쉬실 수 있는 건가요?"
"음,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짓궂게 고개를 갸웃하며 일부러 아이잭 쪽으로 던지는 시선이 분명하게 '그렇답니다, 노력해주시죠' 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아이잭은 어쩐지 울컥했지만, 자그마한 소녀가 아까의 겁먹은 듯한 태도는 던져버리고 종종종 아이잭 앞으로 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기에 그만 뱉으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 시로에 씨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아직 부족해서, 외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건 좀 슬프지만… 그래도 열심히 할 테니까요! 잘 부탁드려요!"
"어, 아, 그래…."
순수하게 반짝이는 소녀의 눈빛을 앞에 두고 차마 험한 소리를 할 수 없었던 아이잭은 우물쭈물 수긍했다.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는 시로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표정이 역력한데도 소녀가 놀랄까 애써 참는 모습이 더더욱 시로에의 웃음을 부채질했다.
모두가 모인 식탁에서도 같은 일이 이어졌다. <원탁회의>에서 시로에의 사무 지원을 위해 왔다고 시로에가 과정은 쏙 뺀 결론만 이야기하자 소년소녀들이 기쁜 듯이 아이잭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기 시작한 것이다. 토우야는 미노리와 마찬가지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이스즈는 "우리 길마, 곧 있으면 머리에 버섯이 돋는게 아닐까 싶었다니까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며 생글생글 웃고, 룬델하우스는 옆에서 음음 하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덧붙여서 아이잭의 허리께에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아카츠키가 진지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잘 부탁한다." 고 말했을 때는 머릿속이 포화상태에 다다라 이제 뭘 어떻게 부탁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냥타 반장 특제 햄버그는 정말 맛있어서, 아이잭은 두 그릇이나 더 먹고 말았다.
"…너희 길드 꼬맹이들은, 네놈을 무척이나 따르는 것 같군."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류작업으로 돌아가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피곤하겠죠' 라며 시로에는 아이잭을 3층의 우드 덱으로 안내했다. 손에는 냥타가 꼼꼼하게 챙겨준 티 세트까지 들려 있었다. 서늘한 저녁 공기 속에 피어오르는 따끈한 수증기와 차향기에 기분이 풀린다. 아이잭은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망설이다가 그렇게 말했다.
"좋은 아이들이죠. 저는 해준 것도 없는데."
시로에도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고 대답했다.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외곽이라고 해도 3층쯤 되고 보면 아키바의 거리가 제법 멀리까지 눈에 들어온다. 노점이 불을 밝히고,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을 상대로 주점이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무렵이다. 호객하는 소리, 벌써 취했는지 신이 나서 떠드는 소리. 활기 넘치는 아키바의 거리.
"헹. <원탁회의> 발안자가 한 게 없다면, 이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거나 다름없지."
"저는 무대를 만들고 제안했을 뿐입니다. 협의를 이끌어낸 것은 여러분들이고, 활기를 되돌린 건 아키바의 <모험자> 모두죠."
"…칫."
이런 대화는 도무지 성격에 맞지 않는다. 칭찬하는 보람이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뻔한데 거기다 대고 얼굴에 금칠을 해줄 만큼 말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아이잭은 혀를 차고 대화를 중단했다.
시로에는 슬쩍 웃었다. 실은 아이들이 그렇게 반응해 주리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이라 스스로도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아무튼 아이들이 아이잭에게 의욕을 심어주게 만든다는 작전은 성공한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랫사람들을 돌보는 성격인 이상 눈앞에서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도 모질게 내치지는 못할 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길드마다 돌렸던 서류가 <흑검기사단>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원탁회의>는 일치단결해서 아이잭에게의 <가벼운 제재>를 결의했다. 아무리 자잘한 작업을 싫어한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확실히 문제라고, 모두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벼운 제재>로서 제안된 것이──시로에의 업무를 돕게 한다는, 다소 황당한 것이었다. 당사자인 시로에는 그걸로 뭐가 될까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9명의 길드 마스터들은 만장일치로 끄덕였다. 크러스티가 연금형은 버리기 아깝습니다만, 하고 사족을 붙이면서도(실제로 전병형과 연금형도 거론되기는 했던 것이다) 효율적인 의식 개선은 될 것이라며 이 벌칙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시로에도 결정된 이상 군소리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렇다면 이참에 아이잭에게도 데스크워크에 흥미…까지는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업무의 요령 정도는 가르쳐 볼까 하고 당시부터 이런저런 기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아이들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유격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을 차례다. 시로에는 천천히 할 말을 정리했다.
"서류 작업도 영 나쁘지는 않던데."
하지만 시로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잭이 문득 흘린 말이 귀에 들어와 시로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사냥터 정보, 최근 상황, 레이드 정보며 공략 포인트.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자료들 뿐이던데. 네놈이 미리 손을 쓴 거겠지?"
"…낯선 주제보다야 흥미가 있고 사전 지식이 있는 주제가 편할 테니까요."
시로에는 작게 웃었다. 아이잭은 생각하기는 귀찮아해도 결코 바보는 아닌 것이다.
"뭘 웃냐. 아무튼, 서류 일이라고 덮어놓고 싫어할 건 아니라는 건 알았다고. 오늘 본 것들만 해도 실제로 전투에 적용하면 꽤나 유익할 것들이었고. ──하지만 아무래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건 좀이 쑤신다고."
"서류 처리 작업이란 건 의외로 전투와 비슷합니다."
"뭐?"
무슨 헛소리냐고, 금빛에 가까운 눈동자가 웅변한다. 시로에는 약간 식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김이 잦아든 잔을 두 손으로 감싸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전투를 위해서는 우선 적을 파악하죠. 어떤 종류의 몬스터인지, 피해야만 할 강력한 특기는 무엇인지, 효율적으로 쓰러뜨리기 위한 약점은 무엇인지. 그 점에 관해서는 서류도 다르지 않아요.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지를 우선 확인하는 겁니다. 상대를 파악했다면 다음으로 효율좋게 처리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합니다. 전투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쪽의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상대의 HP를 효율적으로 깎는다. 그를 위해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특기를 사용하고, 적의 빈틈을 노려 행동을 저해합니다. 서류도 마찬가지로, 정보를 파악했다면 다음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겠죠. 배제할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이라면 이 정보를 저해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 있는가. 이용할 거라면 이 정보를 활용해서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전투와 다른 것은, 그런 것들이 한순간에 끝나지 않고 축적될수록 선택지가 넓어지고 커진다는 점일까요. 이것도 풀 레이드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최종장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정보들이 마지막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죠."
"누가 그딴 걸 생각하면서 싸우겠냐. 전투란 건 그냥 본능적으로──."
"그 <본능적>이라는 것이 이미 <축적된 정보의 집합>인 겁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능숙하게 적을 벨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패턴의 적은 이렇게 상대한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다──수없는 경험을 통해서 아이잭 씨는 이미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체득하고 있는 겁니다."
반론하는 족족 분쇄당해서인지 아이잭은 인상을 썼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우리라. 그럼에도 시로에의 논리적인 이론을 말로 반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게, 이런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니까. 아이잭은 훌쩍 잔을 비우고 새로 차를 따르면서 투덜거렸다.
"그런 건 너처럼 머리 쓰는 놈들이나 알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종류의 정보의 축적은 전투뿐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음식의 모양으로 맛을 추측하는 것 역시 '그런 음식을 먹어보았다'는 경험에서 나오죠. 아이잭 씨도 <대재해> 직후, 스테이터스에 맞춰 강화된 완력과 체력이 처음에는 낯설지 않았습니까?"
그 자신이 현실 세계와 다른 체격에 위화감을 겪었기 때문인지,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무게가 있었다.
이 녀석은 결코 허튼 소리는 하지 않는다. 궤변을 늘어놓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 <원탁회의> 설립 당시부터 이 녀석은 입바른 소리나 거짓말을 늘어놓아 의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지 않고, 진실과 진심만을 가지고 설득에 임해 왔다. 이 녀석의 가장 큰 무기는 그 생각의 깊이도, 발상의 넓이도 아니다. 단 하나의 목적만을 바라보는 올곧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책상머리에 며칠씩 붙어있을 수 있을 것 같냐."
"아무도 아이잭 씨한테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습니다."
"태연하게 지독한 소릴 하는데?"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잊고 계신 것 같지만, 저도 현실 세계에서는 그냥 대학생일 뿐입니다. 이런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구요."
그러고 보면 그런가. 아이잭은 고개를 갸웃하고 멀리서부터 비춰온 불빛에 흐릿하게 비춰진 시로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와 평소의 냉정한 인상 때문에 자주 잊어버리긴 하지만, 그러고보면 확실히 아직 학생이었지. 본래 게임의 세계였던 만큼 플레이어들 중에는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연령 분포가 가장 많긴 하지만, 현실에서라면 겨우 제 앞가림이나 시작할 정도의 나이다. 의식하고 나니 더 새삼스럽게 어린 티가 눈에 들어와서, 아이잭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시로에는 마법으로 밝힌 것인지 색깔도 다양한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제 일이 많은 건, 뭐… <원탁회의>보다도 자청해서 늘리는 부분도 많다 보니 남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가끔은 저도 지긋지긋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무작업이라고 덮어놓고 기피해서 정보가 축적될 여지조차도 버리고 마는 것은…아무래도, 아쉽지 않을까요."
아이잭은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에 잔 손잡이를 걸고 빙글빙글 돌리며, <흑검>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나운 미소를 짓고 짐승의 으르렁거림을 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수 없지. 시작한 이상은 끝까지 어울려 주겠다고. 네놈 방에서 저 서류더미가 싸그리 없어지는 꼴을 꼭 봐 주도록 하지."
"무모한 의욕이네요. …뭐, 도와주신다면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피식 웃은 시로에는 포트에 남은 차를 확인하고 아이잭에게 시선을 던졌다. 별 말 없이 빈 잔을 내민 아이잭의 그것에 차를 채워주고, 남은 차를 자신의 잔에 마저 따랐다. 빈 포트를 내려놓고 살짝 잔을 부딪친 후, 두 사람은 충분할 정도로 식은 잔을 깨끗이 비웠다.
이후 아이잭은 이틀간이나, 의외일 정도로 성실하게─마치 전투에 임하는 것 같은 살기 넘치는 태도로 서류 처리에 매진했지만, 수시로 새로운 서류가 추가되어 왔으므로 결국 끝까지 시로에의 방에서 서류가 자취를 감추는 일은 없었다.
예상 이상으로 성실한 태도를 보인 덕분에 벌칙은 3일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아이잭은 종종 <기록의 지평선> 길드홀을 찾아와서 자청해 시로에의 서류 업무를 도왔다.(본래 자기 몫인 서류는 여전히 밀리고 있으면서도!) 덕분에 아키바에서는 '<흑검>이라도 저 <지옥의 졸개마저 조종하는 사악한 흑막>에게는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라는 소문이 은밀히 떠돌았다…고 한다.
올려놓고 나서 깨달았는데 이거, 눈높이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