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맨틱한 맛 따위 손톱만큼도 없고
<원탁회의> 내에서 시로에의 포지션은 냉정침착한 참모 역이다. 통찰력이 뛰어나고 만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자신의 능력도 포함해서) 어떤 의미 인간미 없고 무자비한 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물론 <원탁회의>에서 몇 달을 함께 지내온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그를 소문 그대로의 냉혹무비한 책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다정한 마음 씀씀이를 보이는, 영리하지만 조금 서투른 데가 있는 청년. 공통된 인식이라면 그 정도일까.
그렇다고 해도 현실 세계에서 사회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들조차 놀랄 정도로 그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었다. 그가 공적인 자리에 사적인 감정을 끌고 오는 일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때문에 오늘 시로에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원탁회의> 대부분의 멤버들에게는 확실 그 이상의 이상 사태였다.
그는 오늘 회의실에 들어오고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크러스티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시로에 군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몇 가지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대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보완책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이미 보고서로 제출했을 텐데요. 읽어 보시고 반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야 여기 무서워.
평소와 똑같은 차분한 미소로 질문을 계속하는 크러스티도 크러스티지만, 고개도 들지 않고 회의 자료를 체크하면서 대답하는 시로에의 사무적인 태도가 한층 더 무섭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료에 코를 박고 종이 다발을 뒤적이면서 빨리 이 무서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가혹한 시간이라도 반드시 끝은 찾아온다. 이 사소한 진리가 이렇게나 기쁜 일이었을 줄이야. 후반에는 회의 안건보다도 음험 안경과 복흑 안경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더 정신력을 소모하고 만 다른 길드 마스터들이 냉큼 자리를 정리하고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중에, 용감무쌍하게도 그 복흑 안경에게 다가서는 용자가 있었다.
아키바의 해바라기──마리엘이다.
"저, 저기, 시로 도령."
"무슨 일이죠, 마리 아가씨?"
아, 다행이다. 마리엘을 향한 시선은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청년 그대로였다. 그 사실에 조금 안도한 마리엘은 조심스레, 하지만 그녀 특유의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혹시 지난 번 사건으로 아직 화난 거야?"
"지난 번?"
"왜, 저번 회의 후에 크러스티 씨가…."
"…아, 그것도 있었죠."
뭐야 여기 무서워!!!(2)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며 한기가 퍼져나가는 듯한 착각에 어쩐지 무의식 중에 지뢰를 밟은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리엘은 오들오들 떨었다. 아직 그 장소에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의 동작이 빨리감기를 누른 것처럼 다급해졌다.
그리고 그 장소에 기름을 퍼붓듯 원흉이 나타났다.
"여성을 위협하다니, 자네답지 않군요."
슥 안경을 밀어올리는 동작은 언뜻 차분하고 산뜻한 인텔리처럼 보였지만, 이 남자에 한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시로에는 크러스티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끌어모은 서류를 탁탁 쳐서 매직 백에 집어넣었다.
"위협이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 건 크러스티 씨야말로 주특기겠죠."
"금시초문이군요. 제가 언제 누구를 위협했다는 건지?"
"아, 위협이 아니라 억지였던가요. 이유도 없이 휘둘리는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나 비슷한지라."
"호오, 그럼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
빙글빙글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대꾸하는 크러스티에게, 짐을 정리하던 시로에의 손이 뚝 멎었다. 예리한 눈길이 오늘 처음으로 크러스티를 흘긋 비추고, 곧바로 마리엘에게 옮겨졌다.
"미안하지만, 마리 아가씨. 저는 크러스티 씨와 얘기해야 할 일이 좀 있을 것 같네요. 먼저 돌아가줄 수 있을까요?"
"으, 으응! 두 사람 다, 싸움은 안 돼!"
"어린애도 아니니까 그런 짓은 안 해요."
시로에와 크러스티를 두고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마리엘의 굉장한 점일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시로에를 뒤로 하고, 마리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은 했지만 싫은 기색은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 문 앞에서 주춤주춤 눈치만 보던 다른 사람들도 그 참에 우르르 따라나서 회의실 안에는 크러스티와 시로에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시로에 군 쪽에서 할 얘기가 있다니 드문 일이군요."
"크러스티 씨야말로 할 얘기가 있는 건 아닌가요?"
"글쎄요, 무슨 소린지."
어디까지고 시치미를 떼는 남자를 시로에는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로 올려다보았다. 이 서툴고 결벽한 청년이 생각할 만한 일이 크러스티에게는 손에 잡힐 듯이 들여다 보였지만 굳이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한참이나 움직임 없이 시선만의 대치가 계속되었다. 시로에는 찌푸린 채, 크러스티는 미소지은 채. 찌푸린 얼굴은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한층 기세를 더해 상당히 험악한 표정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데 신경쓸 여유도 없는 거겠지. 평소 그가 자신의 날카로운 인상을 조금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만큼 그 여유없는 모습이 크러스티는 적이 만족스러웠다.
크러스티가 입가의 미소를 더하자 시로에의 주름은 한층 더 깊어졌다. 점점 더 험악한 기색을 늘리며 시로에는 크러스티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여기에는 과연 크러스티도 놀랐다. 저도 모르게 눈썹을 움직여 놀람을 표시했지만, 지근 거리에서 보이는 시로에의 얼굴이 어지간히도 필사적인 느낌이었기에 이내 그 놀람도 흥미로 바뀐다. 모자란 키 때문에 발돋움을 하고, 거의 매달리듯이 양손으로 크러스티의 가슴께를 움켜잡고 고개를 한껏 들고서야 겨우 얼굴이 닿는 그런 입맞춤.
망설이는 것이 확연한 혀끝이 주춤주춤 치열을 건드려, 크러스티는 기꺼이 입을 열어 주었다. 시작한 것은 자신이면서도 역시 부끄러운 것인지 시로에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아무것도 걸어오지 않는 크러스티에게 안도한 것인지 혀가 조금씩 크러스티의 입 속을 나아간다. 조심스럽게 입 속의 혀를 건드려 보고, 치아를 더듬듯이 확인하고, 입천장을 긁듯이 훑어 보고. 키스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구강 구조를 확인한다는 데에 더 가까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아마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이리라.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어딘가 자신의 행동을 본뜬 흔적이 엿보이는 것이 크러스티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물론 처음 키스했을 때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굳어 있었던 시로에에게 다른 경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것을 모두 그 자신이 가르친 거라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희열이 피어오른다.
시로에로부터의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인지, 발간 얼굴에 엷게 물기가 어린 눈을 하고서는 마무리랄 것도 없이 급히 떨어져 숨을 가다듬는다. 거기까지는 크러스티가 예상한 모습 그대로였지만──어째서인지, 시로에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건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크러스티는 멀리 물러나지 못한 시로에에게 성큼 다가서 그 몸을 끌어당겨 다시 품에 밀착시켰다.
"끝나자마자 그 태도라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받습니다만."
"…상처받을 신경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꾸욱. 등 뒤에 두른 팔에 강한 압력이 느껴져 시로에는 급히 크러스티를 올려다보았다. 발갛게 물든 입술이 눈에 들어와, 좀전의 어중간한 키스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크러스티는 무심코 다시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저 입술을 막아 버리면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된다. 크러스티의 인내심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시로에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말했다.
"크러스티 씨가 왜 자꾸 저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실험이라고 할까, 직접 해 보면 조금쯤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
요컨대 키스의 맛이라는 게 궁금했지만 자신이 하는 걸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크러스티로서는 이마에 손을 짚고 탄식하고 싶어질 만한 얘기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시로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부분에서까지 예상을 벗어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탈력한 나머지 크러스티는 품에 안은 지나치게 둔감한 상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시로에 군과는 근본적인 부분부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움찔. 품 속에서 시로에가 어깨를 움츠렸다.
다음편에 끝난다예요'ㅅ'! 어쩐지 상하편처럼 됐는걸 상하편 맞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