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개를 길들이는 방법 - 5. Stay
카테고리 없음 2014. 4. 16. 16:16 |내용을 구상했을 때 이미 7권 분량을 읽은 후였어서 이쪽이 처음 플롯에 가까워요. 이렇게 쓰려고 했는데 그때는 아직 7권이 한글 정발되지 않았을 때라,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제외하고 쓴 것이 <사나운 개…>가 되었습니다. 다소 중간에 추가된 내용이 있을 뿐 큰 흐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책을 재판할 예정은 없어서 웹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는 조금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양해 부탁드립니다!
목차
1. Come (초안 웹공개)
2. Shake hand (웹공개)
3. Attack - 천칭제 둘째날 밤 이야기. 사건이 일단락되고서 잡담 좀 하다가 아이잭 씨가 충동적으로 시로에한테 키스
4. Wait - 아이잭 씨가 자각하고 시로에한테 고백하러 갔지만 시로에 패닉+당황->보류 선언
5. Stay▼
아이잭은 그 뒤에 곧 돌아갔다.
아이잭이 방을 떠나자마자 시로에는 소파에 파묻히듯 털썩 주저앉았다. 솔직히 무슨 정신으로 서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이잭이 뭐라고 했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을 더듬을수록 얼굴에 피가 몰린다. 시로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괜시리 잔에 남은 흑장미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퍼마셔도 목이 탄다. 이게 다 아이잭 때문이라고, 시로에는 괜히 아이잭을 탓했다.
"……."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그런 직구를 날릴 수가 있지. 이번에야말로 작심하고 장난을 치려는 것이 아닐까, 혹시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야말로 무슨 몰래카메라처럼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마이너스 방향으로 빠지기 쉬운 시로에의 사고는 그런 가정까지 떠올리고 있었지만, 시로에를 향한 아이잭의 표정이 그런 의구심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다소 태도가 거칠고 말투가 험악하기는 해도 아이잭은 근본적으로 솔직한 사람이다. 꾸미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에 담곤 한다. 그런 태도 때문에 오해를 사는 일도 물론 있지만 그는 자신이 잘못한 일은 바로 인정하고 깨끗하게 사과하는 사람이다. 이런 종류의 장난에 찬동하기는커녕 그것을 눈치채이지 않고 실행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똑바로 시로에를 바라보던 눈에 깃든 열기. 그것은 지금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뺨이 달아오를 정도였다. 감으려고도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똑바로 시로에를 바라보는 금빛 눈. 개구리는 뱀의 눈 앞에 서기만 해도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한다던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직면한 고양이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던가. 아이잭의 시선에는 그런 식으로 시로에를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잭의 그 눈빛이 진심이라고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것저것 잔뜩 생각하면서도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아이잭의 행동에 단서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잭의 의도를 모르는 이상 방침을 결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유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을까? 자신은 그때부터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싶어서 도망치던 것 뿐인지도 모른다.
시로에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등이 없는 방을 밝히기 위해 시로에가 불러낸 매직 라이트의 희끄무레한 불빛이 천장 근처에 둥실둥실 떠올라 있었다. 가볍게 손짓하자 흐리멍덩한 표정을 한 그 빛덩어리는 둥실둥실 허공을 유영해 시로에에게 다가왔다. 콕콕 찌르는 시늉을 하면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움찔움찔 물러났다가 다시 두둥실 다가온다. 어딘지 모르게 애교있는 그 동작에 시로에의 입가에도 자연히 미소가 걸렸다.
이 매직 라이트는 사용자의 감정과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 같았다. 룬델하우스의 매직 라이트가 감정 표현이 풍부한 주인과 똑같이 화르륵 불타오르거나 빨갛게 달아오르곤 하는 것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매직 라이트가 그런 다양한 변화를 보인 적은 없었다. 언제나 희끄무레하고 두리뭉실한, 뭐라고도 할 수 없는 멍한 표정으로 둥실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즉, 자신의 감정폭이 그만큼 크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을 불쾌하다거나 싫다고 여긴 적은──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크게 의식할 정도로 문제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생각하는 것이 역할인 자신으로서는 어느 정도 감정을 배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생각해 왔다.
그런 자신의 결핍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은 다소 지나칠 만큼 감정이 풍부했던 동료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릇으로는 다 수용할 수도 없는 극적인 경험들. 질릴 틈도 없이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주고, 현란하고 화려한 자극들이 선택할 틈도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릇의 수용폭이 다소 좁더라도 한계치 이상의 물을 끊임없이 쏟아부으면 그릇이 마르는 일은 없다. 자신이 말라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라고 시로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중시해야 할 국면이 되면 시로에는 쉽게 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마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아이잭을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었다면 아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더라도 그 마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상황, 상대의 성격, 앞으로의 상황과 주위의 반응.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깊이 생각해버리는 바람에 스스로의 발판을 좁히고 말겠지. 상대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
시로에는 작게 중얼거리며 옆에 떠 있는 매직 라이트를 보았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는 이 마법의 불빛이 지은 표정이 지금 자신의 표정일까?
시로에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서툴렀다. 왠지 모르게 좋다, 왠지 모르게 싫다. 자신의 감정이란 겨우 그 정도였다. 왜 좋은지, 왜 싫은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 온다. 깊이 생각할수록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란 으레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로에는 그것만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원탁회의>도 그랬다. 피폐해져가는 아키바 거리의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에 행동에 나섰지만, 그 '싫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정일 뿐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싫은지,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회의 날에는 굳이 옳지 않다고 잘라 말했지만 그 '옳지 않다'는 어디까지나 시로에의 마음 속에 있는 애매한 양심과 도덕에 기반한 판단이었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원탁회의>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제안이 적어도 현상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동의를 얻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대로 두었더라도 아키바는 언젠가 그 나름의 체제를 구축했을 것이라고 시로에는 계속 생각했다.
시로에는 털썩 몸을 옆으로 눕혔다. 매직 라이트가 둥실 시로에의 움직임을 따라 얼굴 옆으로 이동해 왔다.
옆으로 누운 채로 시로에는 테이블 건너편, 아까 아이잭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구체적으로 연상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앉았던 아이잭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시로에는 열기를 띠기 시작하는 얼굴을 소파에 파묻었다.
"으으……."
시로에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좋은가 싫은가를 묻는다면 물론 좋아하는 편이다. 그 구김 없고 의외로 소탈한 성격은 한번 알고 나면 오히려 싫어하기가 어려운 성격이기도 했다. 다짜고짜 키스당했을 때조차도 곧장 화를 내기보다는 그럴 만한 이유를 생각할 정도로는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잭이 자신에게 전한 것과 같은 그런 '좋아한다'인지, 시로에는 알지 못했다.
현실 세계의 시로에는 평범한 학생인데다가 게임 폐인에 방구석 폐인에, 아무튼 연애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 왔다. 한두 번 정도 이웃이나 가까운 여성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지야 않지만 그것들은 그저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정도의 소극적인 감정이었다. 상대에게 말을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걷고 손을 잡는다는 등의, 일반적인 연애는 시로에에게는 너무나 먼 일이었던 것이다. 짝사랑이라고 이름붙이기에도 너무나 엷고 희미한 감정밖에 겪어본 적이 없는 시로에는 아이잭의 강렬하고 직선적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을 달라고 말한 것은 그것을 자신 안에서 곱씹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책상 쪽에 잔뜩 쌓여 있는 자료와 메모들에 눈을 돌리려 해 보아도 의식은 어쩔 수 없이 아이잭에게, 그 말에 돌아가고 만다. 도대체 떠올리기만 해도 이렇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강렬한 공격을 어떻게 소화시키면 좋을지. 그는 정말로 서버 최고의 <가디언>이 틀림없다. <소드 오브 페인 블랙>의 효과 없이도 지금 시로에는 잠시도 그에게서 의식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일을 마저 할 수도, 제대로 잠들 수 있을 리도 없다.
"……정말,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은 얼굴을 파묻은 소파에 반사되어 시로에의 귀로 되돌아왔다.
다음 <원탁회의>가 열린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11월 들어서의 첫 정기 회의다.
이제 이스탈과의 협정도 마무리되고 천칭제도 끝났으니 그동안 조금 미뤄 두었던 안건들을 협의해야 했다. 아직 아이잭에게 답할 말이 정리되지 않은 시로에는 조금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회의에 빠질 수는 없었다. <원탁회의>는 아키바의 전권을 가진 조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치와 외교의 축을 담당하는 기구다.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중에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았다. 설령 저 원탁 맞은편에 있는 아이잭이 답지도 않게 우물쭈물 의식하는 것이 역력한 시선을 힐끔힐끔 보내온다 할지라도, 명색이 참모 역인 시로에에게는 그 자리에 불참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블린>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레벨은 그리 높지 않겠죠. 포위 섬멸을 고려하면 상당한 인원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4개 레기온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예비 병력에 여유를 두어 5개 레기온이 어떨까요. 이번 원정은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합니다. 가능한 한 위세를 보일 필요도 있습니다."
"아아, <대지인>에 대해선가. 그것도 그렇군."
게임 시절과는 달리 이 원정에서 중요한 것은 <고블린 왕>을 쓰러뜨리는 것보다도 고블린 부족의 수를 줄이는 것이었고, 이 자리에 참석한 멤버들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대지인> 귀족들에 대한 배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이 세계에서의 첫 원정이라는 점. 그밖에도 다양한 사전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원정군의 편성이 결정되었다. 인솔 책임자로는 아키바 최강의 전력이라고 해도 좋을 크러스티와 아이잭이, 병력은 보급과 교체를 고려해 5개 레기온으로. 한동안 대규모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소지로와 변화된 정세에 관심이 있는 아인스도 참가하고 싶어했지만 아키바의 대규모 전투계 길드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밖에도 생산계 3대 길드가 보급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소규모 길드 측에서도 원정군의 레벨 편제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아이잭은 간간이, 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힐끔힐끔 시로에에게 시선을 던졌다. 차마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는지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초조한 리듬은 아이잭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리도 알기 쉬운 사람인지. 시로에는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그것은 곤란함이기는 해도 불쾌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잭이 무언가를 감출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모르는 바도 아닌 것이다.
물론 노련한 다른 길드 마스터들이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사람, 의아한 듯 번갈아 양쪽에 시선을 던지는 사람.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듯 깊숙이 팔짱을 끼는 사람이나 알 만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사람까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시로에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시로에는 최대한 시침을 떼기로 했다. 지금은 회의와, 그리고 지금부터 자신이 이야기해야 할 안건에 집중해야 했다.
"그럼 원정 건도 마무리된 참에, 들어주셨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로에는 나지막이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드는 것을 느끼며 시로에는 오랫동안 생각하고 조사해 가다듬은 이야기의 첫머리를 풀어놓았다.
"이 세계에서의 존 구입……그리고, 야마토의 대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회의는 생각보다도 길어지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아키바의 주요 존 유지비는 <원탁회의>에 있어서도 골칫거리였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필요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해도 소유권 포기라는 것은 너무나 큰 대가로 느껴졌던 것이다.
존의 소유권을 포기하면 그 존의 설정을 변경할 수 없게 된다. 길드회관에 한정해 말하자면 자동적인 입장료 징수, 출입 제한, 무기 및 특기 사용 등의 규제가 불가능해진다는 얘기다. 그런 간단한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아키바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여기는 멤버는 적지 않았고, 그들은 치안에 관한 불안을 반대의 이유로 들었다.
시로에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했다. 애초에 주요 존의 독점이라는 방법으로 통제권을 획득한 것은 일시적인 방법이었다. 치안 유지도 입장료 징수도, 현실에서는 이런 시스템 없이도 하고 있는 일이다. 아키바에는 자율이라는 규제가 있다. 대재해 이후의 혼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아키바를 잃고 싶지 않을 테니 그 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아키바뿐만이 아니라 야마토의 모든 모험자와, 존 구입 권한이 없는 <대지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시로에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논파하기보다는 호소하고 설득했다. 이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모두가 이해해준 다음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전원이 고개를 끄덕여 줬을 때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지친 것은 <원탁회의>를 만들었던 그날 이후 처음일지도 모른다. 다른 길드 마스터들은 가볍게 시로에의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고 퇴실했다. 그 때마다 어쩐지 몸둘 바를 모를 민망하면서도 마음 따뜻한 기분이 시로에를 간지럽혔다. 자신의 욕심에서 시작된 일이라 해도 이 마을은 정말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무척이나 흐뭇한 일이었지만──.
시로에는 슬쩍 눈길만 들어올려 정면을 살폈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깊이 찌푸린 아이잭이 금빛 눈으로 시로에를 사납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 교섭은 한층 험난하겠는걸. 시로에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
"……."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내리깔렸다. 아이잭은 그 회의 중에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아서 졸지도 않고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어느샌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것도 멈추고 뚫어져라 시로에를 보고 있었다. 책상 앞에 흩어진 서류만 가만히 그러모아 정리하면서 시로에는 그 침묵을 견뎠다.
문득 <원탁회의>를 결성하던 그 회의 날이 떠올랐다.
그 날도 아이잭은 저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시로에에게는 아이잭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EXP포트> 건을 껄끄러워하고 있을 그가 던질 비판과 반론, 그 모든 것을 시로에는 예상했고 그에 대한 대답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다른 이들이 꺼낼 말이라면 얼마든지 예상하고 시뮬레이션할 수 있었지만, 그 시뮬레이션이 아이잭에게 이를 즈음이면 언제나 생각이 멎어 버렸다. 뭐라고 말을 꺼내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단계가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시로에는 아직 찾지 못했던 것이다.
후우, 그 침묵을 날려버리려는 것처럼 아이잭이 긴 숨을 내뱉었다.
"내 참, 또 터무니없는 짓을 꾸미기는."
아이잭은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사실 무언가 할 말은 잔뜩 있었던 것 같지만──곤란한 듯, 불안한 듯 이쪽을 살피는 시로에의 기색을 깨닫고 나니 전부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회의 중 어떤 반론에도 단호하게 대답하고 그 필요성을 설명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던 녀석과 같은 녀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 아닌가.
아이잭의 그런 한숨 섞인 푸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시로에는 조금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 아이잭 씨?"
"왜?"
"화나지 않으셨나요?"
"화날 게 뭐 있겠냐."
물론 갑자기 회의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놀랐고, 그를 위해 자신도 아키바를 떠날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 때는 아무래도 울컥하기도 했다. 자신이 어렵사리 전한 마음이 이 녀석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서 이 시기인가, 혹시 자신의 고백에서 도망치기 위한 구실은 아닌가──그런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하지만 이 녀석의 설득은 시종 진지했고 논리적이었다. 야마토 전체를 구입할 자금 정도가 되면 어처구니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헤아려볼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큰 금액이다. 그것을 마련할 방안으로 쿠니에 일족──확실히 은행 등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일족의 존재는 대지인들과의 공생에 상당히 익숙해졌다고 여겼던 그들에게도 맹점이었다──과 교섭할 생각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대지를 야마토에 반환하고자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조사하고 가다듬어온 방안일지는 구체적으로 듣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아마도 길드회관을 구입했던 그 순간부터 언젠가는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었으리라. 그 수많은 권한조차도 이 녀석에게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확인차 묻는 건데, 너 이걸 핑계로 나한테 대답하는 걸 미루려거나 했냐?"
"아니요!"
시로에는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듯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야 그렇겠지. 넓은 정황은 그렇게나 멀리 읽고 내다보는 주제에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둔해빠진 녀석이다. 그런 요령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뭐 그야, 회의 중에는 자신도 쓸데없이 부정적인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져 버리는 바람에 한참이나 초조해했지만.
"그럼 됐잖아. 장기전이 될 건 이미 각오했다고."
아이잭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서투르기 짝이 없는 청년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했다. 납득이 갈 때까지 생각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정보를 더 모아 다시 생각하고.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지금까지 깊이 들여볼 일이 없는 분야였기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는 분명히 제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지.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마도 그 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잭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생각 하는 동안은, 계속 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냐?"
장난스럽게 던진 그 말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멍하니 아이잭을 바라보고 몇 차례 눈을 깜박인 시로에는 금세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우왕좌왕 시선을 허공에 헤매인 끝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랗고 무거운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도 못 들은 체, 시로에는 책상 위의 서류 다발을 한손에 움켜쥐고 버럭 외쳤다.
"워, 원정이 끝날 때까지 대답은 보류하겠습니다!!"
"뭐? 야, 시로에!"
아우성치는 듯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빨갛게 물든 귓가에 메아리쳤다. 시로에는 덜컥 요동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도망치듯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지난 며칠간 끊임없이 아이잭을 생각하며 고민한 것도 이렇게나 부끄러운데 앞으로 원정 기간 두 달간을 더 이렇게 보내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길드회관을 달려 빠져나가면서도 시로에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세븐스 폴> 원정도, 자신의 여정도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다. 대답을 기다리게 될 아이잭뿐만 아니라 대답을 생각해야 할 자신에게도 고민이 끊이지 않는 긴 시간이겠지만──그것은 어쩌면 다른 일들처럼 힘들기만 한 고민은 아닐지도 모른다.
햇빛이 내려쬐는 아키바의 거리를 달려가면서 시로에는 요란하게 귓가에 울리는 텔레파시 착신음을 못 들은 척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