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is made at Night
카테고리 없음 2014. 5. 8. 20:05 |
달도 없는 밤이었다.
거리에도 불빛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것 같은 밤 늦은 시간, 시로에는 소리없이 아키바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목적지 없는 방황은 아니었다. 주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조심스러운 걸음이기는 했지만 그 움직임은 망설임 없이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키바의 중심가에서는 상당히 멀지만 <기록의 지평선> 길드홀에서는 그렇게 멀지 않은 서북쪽의 작은 폐옥이 시로에의 목적지였다.
가능한 한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외출이다. 시로에는 평소라면 길을 밝혔을 매직 라이트도 불러내지 않고 엷은 별빛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폐허 주변이라도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은 제법 깨끗하게 정리되었지만 그래도 마구 자란 나무뿌리나 이끼들을 다 치워버릴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조심성 없이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눈치빠른 길드 멤버들에게 들켜 야단을 맞게 되리라. 심지어 시로에는 실내복 그대로에 겉옷 하나를 걸쳤을 뿐인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 겉옷은 장비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 옷이었기에 <성좌의 령의>같은 수복 능력도 없고 방어력이나 방한 효과 따위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이 외출의 목적을 생각하면 밤눈에도 쉽게 눈에 띄는 그 차림새로 나서는 것은 어쩐지 꺼려졌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시로에는 몇 번인가 찾아와서 이미 익숙해진 폐옥의 문을 열었다.
폐옥이라고는 해도 너덜너덜할 뿐 벽과 문이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 건물은 거리와는 격리된 별도의 존이다. 고요한 밤 공기 속에 문 열리는 소리가 예상외로 크게 울려퍼져 시로에는 조금 당황해서 서둘러 문을 닫았다.
"……크러스티 씨?"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시로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금 전에 텔레파시로 그를 이리로 불러낸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먼저 도착해 있을 텐데, 어떻게 된 걸까.
조금 망설이면서도 시로에는 건물 안으로 두어 걸음을 더 들여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소리도 없이 뻗어온 손이 시로에를 강하게 붙잡고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시로에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고 움직인 팔마저 다른 손에 단단히 붙들리고, 그대로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시로에의 입술을 뜨겁고 생생한 입술이 덮쳤다. 읍, 한순간에 숨이 막혀 고개를 저어서라도 뿌리치려고 한 시로에였지만 어깨를 감싸안은 팔이 그를 단단히 당겨 자신에게 밀착시키듯 끌어안는 바람에 시로에는 모든 움직임을 봉쇄당한 채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겨붙은 몸에서 짙은 피 냄새와 엷게 섞인 땀 냄새가 함께 풍겨온다. 거침없이 시로에의 입 속으로 파고드는 상대의 입술에서도 축축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시로에의 호흡 따위는 배려하지 않은 성급한 동작으로 입술을 밀어 열고 침입한 뜨거운 혀가 입안을 휘젓는다. 그 상대는 당혹해 어떻게 해야 할지 헤매이는 시로에의 입술을 제 것처럼 핥고 쓸며 손으로는 시로에의 마른 등을 쓸어내렸다. 낙낙한 로브가 아닌 얇은 겉옷이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시로에에게 전했다.
입 안을 침범한 열기가 시로에의 호흡까지 모조리 빼앗을 기세로 그를 빨아들이고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움푹한 선을 쓸며 내려가 노골적으로 허리 아래, 살갗이 갈라지는 부분을 더듬기 시작할 무렵. 시로에는 참다못해 있는 힘을 다해 상대의 팔을 뿌리치고 그 품에서 도망쳐 나왔다. 젖은 입술을 소매로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몇 번이고 가쁜 숨을 삼키고, 시로에는 그 상대에게 소리쳤다.
"……하아……, 뭐 하는 겁니까, 크러스티 씨!"
간신히 스며든 빈약하기 짝이 없는 별빛으로는 간신히 윤곽을 알아볼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착각할 리는 없었다. 버럭 소리치는 시로에를 앞에 두고 그는 슬쩍 양팔을 들어올려 항복 신호를 했다.
그러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가 있었기에 그 전면 항복은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감출 생각도 없는 듯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그는 울림이 좋은 단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끔은 취향을 바꿔보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크러스티 씨가 새디스트인 건 하루이틀도 아니니 놀라울 것도 없지만 저는 매저키스트가 아니거든요. 그런 소릴 할 거면 다른 사람이나 찾아보시죠."
"호오? 정말로 다른 사람을 찾아도 되겠습니까."
윽. 크러스티의 떠보는 듯한 대꾸에 시로에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시로에가 크러스티와 이 폐옥에서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진 것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횟수는 넘어가고 있다. 대개는 스트레스 해소 삼아 개인 훈련에 나선 크러스티가 손맛이 부족한 어설픈 몬스터들 때문에 어중간하게 흥분을 다 풀지 못한 때였다. 시로에라고 처음부터 이런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크러스티의 일견 타당해 보이는 설득에 넘어가서 떠밀리듯 한 번 관계를 갖고 보니 얼떨결에 그대로 정착되고 만 것이다.
이제 와서 남에게 떠넘기기에는 아무래도 뒷맛이 나쁘고, 무엇보다 <원탁회의>에 관련된 소문도 걱정이 된다. 크러스티가 그렇게 처신을 함부로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확률이기도 하니, 요즈음은 차라리 자신이 얌전히 감수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잦은 건 좋지 않으니까요. 우리 길드에는 아이들도 있고."
"흐음. 자신들의 길드 마스터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역시 교육에는 좋지 않을까요."
"정말로 그만둬 주세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시로에는 날카로운 눈길로 찌릿 크러스티를 노려보고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조금 전 단단히 붙잡히는 바람에 구김이 남은 겉옷도 벗어서 안경과 함께 한쪽에 잘 개켜 놓고 두 손으로 크러스티의 앞섶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에서 풍기는 기척은 사나운 흥분을 전하고 있는데도 겉보기에 그런 흔적은 조금도 없이 그저 단정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에 스칠 듯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 시로에는 대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다른 상대를 찾을 생각──있는 건가요?"
크러스티의 그린 듯한 미소가 더한층 깊어졌다. 아직 뜨거운 제 입술을 붉은 혀로 날름 핥은 크러스티는 시로에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 입술에 깊이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