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流砂

카테고리 없음 2014. 12. 11. 14:06 |
달걀님 썰 기반으로! 짧습니다′ㅁ` 썰 좋아서 끄적끄적...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 크러스티는 의자에 깊이 등을 묻은 채 무의미하게 손끝을 튕겼다.
이 방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두꺼운 커튼이 낮과 밤을 가리고, 단단한 벽이 열기와 냉기를 막는다. 규칙적이고 정확한 생활로 다듬어졌던 체내시계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다.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을 감았다 뜨고, 최소한의 식사를 할 뿐.

살아간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무딘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사고의 속도조차도 느려지는 법인지, 그런 화두를 떠올려 봐도 연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당초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명 반응이 있다는 것만으로 살아있다고 해도 되는 것인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시간도 흐르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면──잠이란 그저 죽음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로지 잠을 위해 존재하는 이 방은 차라리 무덤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시로에가 마지막으로 깨어났던 것이 얼마쯤 전이었는지, 사실은 크러스티도 이미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을 헤아리기를 포기한 것은 반년째였던가, 1년째였던가. 아무렇지도 않게 깨어나서 짧은 하루를 보내고는,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잠든다.
그리고 다음의 기다림은 점점 더 길어지기만 할 뿐.
무미건조한 시간만이 한 겹 한 겹 이 방에 내리쌓인다.

──차라리 이 기다림을 끝내 버리면.

굳어진 손끝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부드러운 감촉의 이불을 젖히고, 그는 가만히 누워 있는 시로에를 내려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는 정말로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숨은 쉬고 있는 걸까. 딱딱한 손끝이 뺨을 스쳐도 시로에는 깨어날 기척이 없었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지만, 감각이 둔해진 몸으로는 잠든 사람의 옅디옅은 호흡을 제대로 감지할 수 없었다. 덜컹,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흐른다. 크러스티는 급히, 시로에의 목에 손을 댔다. 귀 아래쪽의 부드러운 피부에 손을 대고 한껏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약한 진동이 손끝에 전해져온 순간에야 간신히, 손에 닿은 피부가 아스라한 온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크러스티는 입술 끝을 비틀었다. 스스로의 추악한 모순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차라리 스스로 끝내 버리기를 바랐던 주제에, 정작 죽음을 떠올린 순간 당황할 것은 뭐란 말인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전락했더란 말인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몹쓸 것이 아닌가.
맥박은 가늘게, 그리고 느리게 뛰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은 꺼질 듯 말 듯 흐리기만 하다. 크러스티는 천천히, 조금 마른 시로에의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끝에 닿는 진동은 두 배가 되었다.
이대로, 힘껏 두 손을 움켜쥐면.
전사직의 스테이터스로 그런 짓을 하면, 이 가느다란 목덜미 따윈 순식간에 조여들어 꺾이고야 말 것이다. 이 상태의 시로에가 대신전에서 되살아날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를 깨우게 될까, 영원히 잠재우게 될까.
크러스티는 입술을 짓씹었다.
목을 감싼 두 손은 석화에라도 걸린 것처럼 단단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끝을. 그렇게 되뇌어도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모순 투성이인가. 말라버린 눈꺼풀이 뜨거웠다. 느릿할 터인 맥박이, 소리도 없는 그 진동이 천둥처럼 귀를 울렸다.

──나는,
──나는 이 시간을.

두 손 안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삼킬 때처럼 목이 울리고, 꿈쩍도 하지 않던 시로에의 몸이 작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싸쥔 손 안의 피부 아래에서 피가 흐르는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눈꺼풀이 힘겹게 들리고, 말라붙은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언젠가 밤하늘 같다고 생각했던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

켜켜이 쌓여 굳어졌던 시간이, 소리도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Posted 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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