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에2를 쓰고 싶었을 뿐이라 커플링은 특별히 없습니다! 로에2랑 시로에랑 체스 두는 얘기.
살짝 기운 오후의 햇살은 적당히 밝았고, 열린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은 부드럽고 상쾌했다. 소풍을 가기에도 낮잠을 자기에도 최고의 날씨일 것이다. 시로에는 합계 일곱 번째, 책상 앞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는 책상에 머리를 박을 뻔 하고서 제풀에 놀라 일어나기를 반복한 참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 날씨에 방안에서 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변명으로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냥타 반장이 준비해 준 점심 식사가 너무 맛있어서(언제나 그랬지만) 조금 과하게 먹은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르지. 따뜻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평화로운 오후, 마음 편한 길드 하우스. 모든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고 핑계라면 핑계일 수 있겠지만──물론, 그것이 시로에가 일을 게을리해도 좋은 이유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다음 번이야말로 정말로 책상에 머리를 박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시로에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은 책상 앞을 떠나 활짝 열린 창가로 가서 바람을 쐬어 보는 것부터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좀 나을지도 모르지.
일어나면서 보니 일을 도와줘야 할 로에2는 일찌감치 맡겨진 일을 내팽개치고 소파에 모로 누워 낮잠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부럽다.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밖에서 누가 찾아오는 기척은 나지 않았으니 길드 멤버 중 하나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시로에는 들어오세요, 하고 대답했다.
"저어, 시로에 씨……."
"미노리? …만이 아니네. 어쩐 일이야, 다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미노리였다. 뒤이어 토우야와 이스즈와 룬델하우스의 모습도 보인다. 식사가 끝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이지. 오늘은 훈련이 휴일이고 별 일도 없으니 길드하우스에서 느긋하게 지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시로에 형, 우리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미노리, 체스 엄청 잘 해요!"
"한 번도 이겨 보질 못하다니 면목이 없군."
"자, 잠깐만. …한 명씩 얘기해 주지 않을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와글와글 신이 난 듯한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말을 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시로에는 손짓해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멋적게 웃은 아이들이 차근차근 설명한 것은, 그러니까.
"미노리랑 체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스에 엄청 강해서 미노리가 자신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라, 몇 차례 체스를 두고 떠들며 놀다 보니 혹시 시로에라면 상대가 될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 이렇게 쳐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문을 연 미노리가 지나치게 송구스러워 한다 했더니.
"죄송해요, 시로에 씨 바쁘신데…. 저는 그만두자고 했는데, 어쩐지 다들 신이 나 버려서."
"아니, 미노리가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사과하는 소녀에게 시로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미노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 데다가 어차피 졸음을 못견뎌하고 있던 참이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시로에는 민망해 하는 미노리를 도닥이며 테이블 위에 체스판을 놓았다.
"나도 좀처럼 일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잘 됐지. 그럼 잠깐 상대 좀 해 줄래?"
"……, 네!"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잔뜩 흐려져 있던 미노리는, 시로에의 그 말에 겨우 얼굴을 들고 활짝 웃었다.
"체크메이트."
"앗, 아아…."
미노리와의 승부가 결판이 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야가 넓고 수 읽기도 빠른 그녀였지만, 역시 시로에에 비해서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체스판을 훑으면서 몇 번이나 중얼중얼 수를 계산해 보던 미노리는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항복 사인을 했다.
"졌어요…. 감사합니다."
"응, 미노리도 수고했어."
시로에와 미노리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빙긋 웃었다.
"흐응, 제법 괜찮은 게임이었잖아."
"앗, 로에2 누나!"
아까까지 잠에 푹 빠져 있던 주제에 소리도 없이 언제 다가온 건지, 뒤에서 체스판을 들여다본 로에2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로에2가 다가온 것은 커녕 이 방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깜짝 놀라 일어선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으며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미노리는 제법인걸─. 이 나이에 이런 실력이라니, 장래가 기대돼."
"응, 미노리는 정말로 수 읽기가 뛰어나. 조금 더 지나면 상대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 그런…."
남매처럼 꼭 닮은 두 사람의 칭찬에 미노리는 어쩔 줄 모르고 뺨을 새빨갛게 붉혔다. 로에2는 그런 미노리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소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뺨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시로에는 두 사람의 꺅꺅대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며 체스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 토우야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입에 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짧은 사건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혹시 있잖아, 시로에 형하고 로에2 누나. 둘이 체스를 둔다면 어느 쪽이 더 세?"
"음?"
그 순진하기까지 한 질문에 로에2는 미노리를 괴롭히던 손을 뚝 멈추었다.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긴 듯 허공에 던진 눈길이 이내 시로에와 마주치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픽 웃어버렸다.
"우리 둘이라면, 그리 재미있는 게임은 안 될걸."
"게임은 즐거워야 하는 법인데 말야."
영문 모를 대답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더 강한지를 물어봤는데 재미있는 게임이 안 될 거라는 말은 뭐지? 대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기색에 시로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으음,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냥 우리 둘이라면 체스라든가…, 그런 게임은 별 의미가 없어.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곤란한 듯 설명할 말을 찾고 있는 시로에에게 로에2가 피식 웃으며 제안했다.
"그냥 한 번 보여주는 건 어때?"
"본다고 해서 이해가 될까…. 아니,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나."
"그래,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잖아?"
"그 말도 내 기억에서 나온 거야? 너한테 들으면 어쩐지 어색하네."
"사용처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체스판에 말을 배치하기 시직했다. 로에2가 흰 말, 시로에가 검은 말이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흰 말을 잡은 로에2에게 시로에는 약간 쓴웃음을 지었지만 결국 별 말 없이 배치를 끝냈다.
로에2가 흰색의 폰을 움직이는 것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말을 옮겨 놓는 탁탁 소리만이 끊이지 않고 방을 울렸다. 시로에가 손을 움직이면 곧바로 로에2가, 그녀가 손을 떼기도 전에 다시 시로에가. 순서가 엉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란하게, 생각하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재빠른 속도로 두 사람은 반상 위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먼저 체크메이트를 고한 것은 로에2였다. 시로에가 룩을 희생시켜 턴을 벌고, 그 다음에는 시로에의 나이트가 흰색의 킹을 사정거리에 포착했다. 로에2는 비숍을 희생시켜 왕을 보호했다. 그 뒤로도 한 수 한 수가 치명타를 찌르는 체크메이트 공방이 몇 차례나 더 계속된 끝에──마침내 흰 나이트가 검은색의 킹을 쓰러뜨렸다.
"──아, 역시."
시로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 저기…. 왜 그렇게 빠른 거야…?"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주저주저 꺼낸 토우야의 질문에 로에2가 선뜻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은 대답이 되지 못하고 토우야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물론 (미노리를 제외한)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체스판과 로에2를 번갈아 보는 아이들에게 시로에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나하고 로에2는 기본적인 사고회로가 비슷하고 서로의 성격도 너무 잘 아는 거야. 그러니까 처음 몇 수로 이미 서로의 모든 수를 다 읽어 버리는 거지."
"그 다음은 그냥 책을 읽는 거나 똑같아. 정해진 순서에 정해진 말을 움직일 뿐이거든."
"그러니까 이런 게임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한 선공을 잡은 쪽이 이기는 거지."
그렇게 말해도 대체 그게 어느 정도의 계산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세 사람은 무심코 미노리에게 시선을 향했고, 갑자기 시선을 집중당한 미노리는 당황해서 붕붕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못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가능한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두 사람을 감탄과 경외와 기가 막힘이 뒤섞인 시선으로 올려다 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친근한 것인지 날이 선 것인지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흐흥, 그러면서 쪼잔하게 졌다고 억울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 형님."
"뭐 그 정도야 여동생에게 못해줄 것도 없지."
"체스 말고는 또 어떤 게임이 있는지도 궁금해지는데, 이렇게 된 김에 다른 걸로도 더 겨뤄보는 건 어때?"
"이 세계에는 오락이 적으니까 개발과 테스트를 겸하는 것도 괜찮겠지. <제8상점가>라면 이미 복원해둔 게임을 몇 종류쯤 가지고 있을 테니 지금 연락해 볼까?"
그렇게, 묘한 방향으로 불이 붙은 이 남매 아닌 남매는 그로부터 몇 주간 현실 세계의 보드게임을 이 세계에 구현해 테스트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해 매진했다고 한다.
로에2는 아직 시로에랑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8권에서 시로에를 칭하는 대명사로 '兄君'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와 세상에 이 단어 하나로 로에2의 살짝 거만한 태도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로에를 오빠 대접은 해주고 있다'는 점이 너무 또렷하게 드러나서 와 세상에 작가님…. 엊그제 공개된 10권 예고편 로에2의 편지에서는 시종일관 'あなた'라고 쓰고 있더라고요! 일단 '여동생'을 자칭하면서! 뭐지 이 존중해 주는 듯한 미묘하게 얕보는 듯 하면서 그럼에도 존중을 하기는 하는 완전히 제3자적인 시선에서 느끼는 묘한 친근감이 묻어나는 그런 말투…는 내가 뭐래는거야 횡설수설()
아무튼 로에2의 대사 중에 있는 '형님'은 '兄君'을 옮긴 말입니다. 원래는 '오라비 군'쪽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살짝 무시하는 느낌과 그럼에도 오빠 대접은 해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베스트) 이 장면에서는 '형님'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