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숯도 한때는 흰 눈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카테고리 없음 2013. 12. 13. 20:28 |목표는 디즈니였는데 결과물은 사탄의 인형()
겨울을 대표하는 최고의 이미지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이 눈을 떠올릴 것이다. 팔랑팔랑 떨어져 내려 천지를 덮고, 색을 감추고, 소리를 삼키는 하얀 폭력. 눈에 가리워진 세상은 본래의 모든 성질을 감추고 차가운 겨울 속에서 잠에 빠진다.
자그마한 소녀는 그 소리없는 폭력을 견디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이미 눈은 소녀의 발목 깊이까지 쌓여 있었지만 아직도 떨어지는 눈송이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둘러쓴 검은 망토의 어깨 위에, 눌러쓴 모자 위에 차례차례 쌓여서는 때때로 손을 움직여 털어내야 할 정도였다. 그런 동작을 무심히 되풀이하며 소녀는 어슴푸레한 눈길 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때때로 엿보이는 소녀의 매끄러운 뺨은 눈에 지지 않을 정도로 희다.
그러나 소녀가 내뱉는 숨결이 하얗게 흐리는 일은 없다.
어깨 위에 쌓인 그 눈이 녹아 사라지는 일도 없다.
소녀에게는 체온이 없는 것이다.
눈 덮인 나무 아래를 빠져나가 언덕으로 이르는 오르막길을 따라 걸어, 소녀는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형이 험하지 않은 왕국에는 몇 안 되는 나즈막한 언덕. 스노우볼 속의 그것처럼 눈에 잠긴 왕국이 눈 아래 가득히 펼쳐진다. 그리고 언덕 끝에 머무는, 눈발 속에 희게 물든 그림자.
소녀는 잠깐 멈춰서 차림새를 정돈하고 우아하게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소녀의 자그마한 몸에는 눈길 속에서 여기까지 오르는 길이 힘겨웠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그런 기색은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가볍게 어깨를 털고 머리에 쓴 후드를 벗고, 소녀는 입을 열었다.
"──역시 눈이 오면 즐거워?"
소녀가 다다른 기척을 진즉 눈치챘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자는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일견 푸르스름하게까지 보이는 창백한 안색. 뺨에 새겨진 달과 태양의 문양.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흘긋 소녀를 담은 것은 한순간이었고, 이내 그는 녹은 눈처럼 미소지었다.
"Bonsoir, Mademoiselle de Crépuscule."
한 손을 들어 허리를 숙여 보이는 동작은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하다. 소녀도 치맛자락을 들어올리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답례했다.
"Guten Abend, Herr Hiver."
겨울의 이름을 가진 청년과 소녀의 모습을 한 인형은 꼭 닮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별일인걸. 그쪽에서 나를 찾아오다니."
"어디로 가든 내 마음이지."
그러니 청년을 찾아온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소녀는 사뿐히 작은 발을 옮겨 언덕 끝자락에 섰다. 청년이 바라보던 것과 같은 풍경을 유리알 눈동자에 담고, 바람에 흐트러지려는 머리카락을 바로잡으면서 물었다.
"…<겨울>에 물든 세계를 바라보는 건 어떤 느낌이야?"
"글쎄."
소녀는 자신이 보는 것과 청년이 보는 것이 같은 풍경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각도나 빛 따위의 물리적인 차이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차이에서였다.
이 왕국에서 눈을 뜬 순간 소녀는 깨달았다. 여기에 복수는 필요없다. 여기에 살의는 태어나지 않는다. 아름답고, 상냥하고, 다정한 세계. 그래, 마치 마지막까지 복수를 원치 않은 그녀──엘리자베트와도 같이.
그 온기는 불길을 품고 태어난 소녀에게는 너무나 뜨거웠고, 그 상냥함은 살의를 노래하는 소녀에게는 지독히도 달콤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세계에서 다시 눈뜨고 만 것일까.
지금까지 복수 이외의 삶의 이유를 알지 못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것을 찾아내는 법을 몰랐다. 이유는 커녕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조차도 없었다. 지금 소녀는 그저, 왜 이 세계에 자신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 찾고 누구에게서 구해야 할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눈만이 겨울의 표상인 건 아니지."
나지막하게 흘러 떨어진 목소리가 어딘가 서린 음색을 품고 있었기에 소녀는 무심코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마을을 향하고 있는 청년의 얼굴은, 소녀의 시야에서는 읽기 어려웠다.
청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앙상해진 나뭇가지도, 얼어붙은 흙바닥도, 매서운 칼바람도──전부, 겨울의 일부고."
보랏빛의 시선이 소녀를 내려다본다.
"그것이 나의 세계야."
소녀는 기이한 것을 본 듯이 청년을 올려보았다. 그늘진 표정에 깃든 것은 기묘한 혼재였다. 흐뭇한 듯, 슬픈 듯, 화난 듯, 안타까운 듯. 짙푸른 코트 아래 장식된 붉은 보석이 불길하게 일렁인다.
그의 세계──생과 사의 틈새, 아침과 밤의 황야. 겨울의 이름을 가진 청년은 태어나는 아침의 속삭임과 죽어가는 밤의 고요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쌍둥이 인형이 가져오는 <이야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소녀는 지금까지 이 청년이 누구보다도 국왕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가 한순간 엿본 이 메마른 허무를──왕은 알고 있을까? 생도, 사도 없이 그저 되풀이되는 황야에서 홀로,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한없이 보고 들으며 그저 기다릴 뿐인 자의 황폐해진 마음을 알까?
소녀는 자신만이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이유없는 악의, 애증을 먹고 태어난 살의. 이 땅이 낙원이기에 태어난,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허무. 하지만,
──여기에도 있었네.
이 세계를 좀먹는 이단자가.
그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아름다운 겨울에 감싸인 왕국을 그저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받아들이려고은 하지 않는 청년.
숨을 쉬기가 괴로울 정도로 포근하고 아름다운 그 세계에 결코 들어서지 않고 안온한 살의에 잠기려는 소녀.
세계에서 유리된 소녀와 청년은──역시 꼭 닮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네. 당신한테 눈의 포근함 따윈 눈 씻고 봐도 없는걸."
"네게 있는 건 동화의 무구한 잔혹함 뿐이고 말이지."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제법 가늘어진 눈가루가 때때로 별가루처럼 반짝이며 흩뿌려진다. 오는 길에는 혹한의 다이아몬드 더스트 같던 그것이 지금은 어쩐지 아름답게 느껴졌다.
문득 청년이 그늘을 거둔 상냥한 얼굴로 몸을 굽히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곡 추실까요?"
"……."
소녀는 청년을 올려다보고, 언제나처럼 심술궂은 미소를 머금고 작은 손을 올려놓았다.
"원하신다면."
청년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소녀의 키로는 차이가 너무 난다. 소녀는 구두를 신은 작은 발을 청년의 발 위에 딛고 섰다. 허리를 감싸는 대신 양손을 가볍게 받치고, 소녀에게 맞춘 작은 보폭으로 푹신한 하얀 융단 위를 거닐었다. 댄스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책에 가까울지도 모를 움직임이었지만 소녀도 청년도 그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멈추지 않는 아침해가 쌓인 눈을 비출 무렵에는 소녀도 청년도 다시 평화로운 세계의 가면을 뒤집어쓸 터다. 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은 그들만의 연회였다.
어쩌면 음악이 끊이는 일 없는 왕국이 소리를 빼앗긴 이 밤이야말로 이단자들에게 어울리는 밤인지도 모른다.